누가 두 원로학자, 이 늦깎이 소설가를 분노케 하는가 [책&생각]
안삼환·김민환 작가 새 장편 출간
뒤늦게 매료된 ‘동학사상’ 톺아
수운 탄생 200년·동학혁명 130년
정부·사대세력 향해 날선 비판
바이마르에서 무슨 일이
안삼환 지음 l 솔 l 1만6000원
등대
김민환 지음 l 솔 l 1만6000원
내년 여든을 앞둔 동갑의 두 명예교수가 나란히 장편소설을 펴냈다. 한권은 경상도말, 한권은 전라도말이 이 나라의 근현대로 독자를 인도한다. 두 석학, 아니 ‘작가의 말’을 먼저 들어보자.
“(최근) 우리의 정치적 상황이 정말 입에 올리기도 싫은 저열한 소극 같아서 자연히 할 말이 많아졌고, 산문 작가로서 …평정심이 사라지고 가슴 속에는 부질없는 진심(瞋心, 분노) 가득함을 느꼈다.” 윤석열 정부를 두고 한 말이다. 한때 국내 노벨문학상 후보자 의견을 서방에서 물어간 독문학자 안삼환 서울대 명예교수의 소설 ‘바이마르에서 무슨 일이’에서 볼 수 있다. 그는 한겨레에 말했다. “지난해 독일서 강의할 즈음 이태원 참사 대응을 보면서 이 정부에 국가와 민족에 관한 프로젝트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건 정말 촛불혁명에 대한 반동 아닌가요.”
저널리즘에 헌신해온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의 소설 제목은 ‘등대’다. 이런 후기로 매조진다. “일본은 우리에게 사죄해야 하는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들 사전에 있는 가장 곡진한 말로 사죄해야 한다. (…) 후손을 제대로 가르치고 싶다면, 사죄는 해마다 해도 되고, 달마다 해도 되고, 날마다 해도 된다.” 소설의 무대는 남해 소안도. 그가 한겨레에 말했다. “소설이래도 팩트를 비틀 순 없지, 게다가 역사소설 아닌가요. 어떻게 이 외딴섬에서 3·1운동이 격렬히 일어났을까 궁금했습니다.”
1945년생 두 작가가 2024년 5월 각자의 소설로 한 출판사에서 만나기까지 공교롭게 ‘동학’이 있었다. 어떤 기획이나 의도가 없었다고 한다. 평생 서구 학문에 천착하고 갈무리한 원로학자들이 자연스레 구한말 자생한 동학에 귀착하더란 얘기다. 핏대 선 ‘작가의 말’도 바로 동학사상을 논거 삼고 있다.
두 소설, 공통점은 더 있다. 봉기, 전쟁, 종교로서의 동학이 아닌 사상의 동학을 파고든다. 문학에선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바다. 작가들도 처음 공부해야 했다. 늦게 닿은 세계관으로 지난 시대와 삶을 조명하고 미래를 전망하고자 한다. 전작이 없진 않지만 아무렴 ‘문단의 이방인’이 벌인 일들이다. 은퇴자의 2모작 창작 지평을 넓힘은 물론이다.
‘바이마르에서 무슨 일이’의 주인공 철학교수 최준기. 1958년생으로 대학을 정년퇴임한 2023년 독일로 여행을 떠난다. 1980년대말 본대학에서 5년 유학 끝 박사학위를 취득했던 나라다. 수년 전 한국서 만난 독일 여성 클라라 박사의 초청이 있었거니와, 무엇보다 “자신들의 권세 유지만 꾀하는 ‘괘씸한’ 집권 세력”에 진력이 났던 차다. 칸트와 헤겔, 니체의 서양철학으로부터 수운과 해월의 동학으로 공부가 바뀐 데에는 최 교수의 조부(최내천)때부터 경북 영천에서 동학과 결부된 내력 탓이 없지 않다. 니체의 말대로라면 “아모르 파티”(운명에의 사랑)일 것이다.
괴테와 아버지 최여경, 1980년 광주에서 숨진 대학동창 김장춘 등 혼령과의 (꿈속) 접신이 형식적 묘미라면, 괴테와 실러가 고전주의를 꽃피운 ‘유럽의 문화수도’ 바이마르의 예나대학에서 동서양 학생들 앞 최준기가 동학사상을 특강하게 되는 설정은 내용의 묘미다. 지난 1세기 “피지배와 피억압”을 갈구한 저항의 과거를 복원하는 방편이자, 패퇴하면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은 동학의 “평등 민주 사상”의 확장성, 즉 미래를 상상케 한다. 그 맥락에 바로 지금 정부에 대한 원로교수의 날선 개탄이 있는 것이다.
김민환 작가가 3년 들여 완성한 ‘등대’는 강제합병 한해 전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도에서 실제 있었던 ‘좌지도 등대 습격사건’이 모티브다. 덜 조명된 항일사건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되 사건을 가능하게 했던 동학사상의 도도한 전이에 소설은 골몰한다. 육지에서 쫓겨온 동학교도에 의해 동학을 받아들인 섬사람 이준화가 소설서 가장 극적 인물인바, 실제 사건의 주동자다. 하지만 소설은 섬 서당 훈장 서범규와 특히 그의 아들 서진하에 의지한다. 사상을 일상의 삶으로 실체화하는 인물로서, 서범규가 ‘형이상학’ 쪽이라면, 서진하가 ‘형이하학’ 쪽이다. “서학에서는 하느님이 말씀을 내렸으니까, 그것을 진리라고 믿고 무조건 따르라고 하는디, 동학은 그것이 아니여. 서학에서 ‘나’는 종인디, 동학에서는 ‘나’가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여.” 공자를 여전히 중시하던 서범규의 말이다. 서진하는 일제 침탈에 맞서 등대 습격에 가담하면서도, 소안도 거주 일본 여성 미유키를 연모한다. 그와 먹고살고자 한다. 이 소설을 서진하와 미유키의 연애소설이라 일러도 무람없겠다. 그들 애틋한 연애가 동학사상의 본원인 ‘무위이화’(자연스레 이뤄짐)의 재현이요, 경계를 넘어선 ‘개벽’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좌지도 등대가 소안도 방면이 아닌 바깥 큰 바다를 향하면서 결국 어민이 아닌, 수탈 곡물을 나르는 화물선, 무기·군인을 실은 군함을 안내하리란 위험성을 알린 이도 바로 전라도 사투리 진한 미유키다.
서울 지식인 본위의 ‘개화 정쟁’이 서구적 근대화를 갈급한 것이라면, 소안도는 고유한 동학사상을 통한 민중의 현실타파 현장이다. 훈장들끼리 사상 논쟁을 벌인다. 이 섬도 김옥균을 암살한 수구파 홍종우와 관군의 탄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소설은 결미에 이르러서야 등대 습격사건의 ‘소박한’ 최후를 노정한다. 1909년 1월이다. 이준화 등이 죽고, 등대 기관실에 겨우 불을 질렀을 뿐이다. 정한론을 침 튀겨 말하던 일제는 이를 계기로 완도 지역 의병 소탕에 나서고, 배상비를 뜯어간다. “등대를 부수는 것이야말로 새 등대를 세우는 일”이 된다는 이준화의 뜻은 패배한 것일까. 1920년대 소안도 주민 2천여명 중 800명이 불령선인으로 감시받고, 섬 출신 서훈 받은 독립유공자만 지금껏 스무 명이 넘는 데서 그렇지 않았음이 짐작된다.
이 소설은 김 작가가 대학 정년퇴임 뒤 소설을 쓰겠다고 보길도로 내려간 이래 완성한 세번째 장편이다. 두 작가에게 도올 김용옥이 번역한 ‘동경대전’은 중요한 참조가 되었다. 또한 공교롭다. 지난해 독일 대학 강연차 방문하면서 소설을 구상했다는 안 교수가 잘 대변한다. “제가 도올의 아비투스(습속)를 별로 안 좋아했습니다. 아마 책도 사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임우기 평론가가 1년반 전 준 책을 보고, 학자로서의 깊이와 정확성의 면모가 확연했고 그를 달리 보게 됐어요. 그 책이 아니었음 못 썼을 겁니다.” 김 교수도 “김용옥 교수가 ‘동경대전’ 번역서를 내지 않았다면 이 소설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라 했다.
발판 삼아 동학사상을 김민환이 파고들었다면 안삼환은 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들이 서구 근대화의 망령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읽히고자 함일 거다.
글·사진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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