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돌봄’을 찾다…“옛날엔 가족이 돌봤다”는 말은 허구
가족·국가만으론 ‘좋은 돌봄’이 불가능
돌봄의 ‘당사자 주권’에 기반한 이론
다양한 돌봄 모델 현장조사까지 망라
돌봄의 사회학
당사자 주권의 복지사회로
우에노 지즈코 지음, 조승미·이혜진·공영주 옮김 l 오월의봄 l 4만8000원
일본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이자 사회학자인 우에노 지즈코(도쿄대 명예교수)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등 수많은 저서를 쏟아낸 저자다. 그의 책들은 한국 사회에 꾸준히 소개됐고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이 가운데 그가 2021년에 쓴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는 노년기와 죽음에 대한 통념을 뒤집어 주목을 받았다. 이 책에서 그는 일본의 개호보험제도(타인을 돕는다는 뜻으로 ‘고령자 돌봄’을 의미하며, 한국의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와 유사) 20년의 명암을 다루며 ‘돌봄의 사회화’ 과정을 논의한다.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가 ‘돌봄의 사회화’를 다룬 대중서에 가깝다면, 그가 앞선 2011년 쓴 ‘돌봄의 사회학’은 ‘고령자 돌봄’을 본격적으로 다룬 학술서다. 뒤늦게 이 책이 최근 한국에 번역 출간됐는데, 번역자 조승미는 ‘옮긴이의 말’에서 900쪽이 넘는 학술서를 출판해줄 출판사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전한다.
책은 크게 ‘돌봄이란 무엇인가’ ‘좋은 돌봄이란 무엇인가’ ‘시민사회의 역할’ ‘돌봄의 미래’로 구성했다. 이론과 현장조사 연구 모두를 아우르는 방대한 작업의 결과물이라 ‘벽돌책’을 피할 수 없었겠다. 비영리단체(NPO법인)의 이사장이기도 한 저자는 현장 연구에 해당하는 ‘시민사회의 역할’ 부분에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고, 이러한 생생한 현장 사례는 국내 복지 연구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돌봄을 개념화하는 것부터 간단치 않다. 일반적으로 돌봄이라고 하면 ‘타인을 배려하는 행위’처럼 윤리적인 측면을 부각하거나 자식 돌봄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저자는 영국의 사회학자 메리 데일리가 편집하고 국제노동기구(ILO)에서 간행한 ‘돌봄노동’에서 쓴 돌봄에 관한 정의를 채택한다. 데일리는 “돌봄은 의존적 존재인 성인 또는 아이의 신체적이며 정서적인 요구들, 그것이 수행되는 규범적, 경제적, 사회적 구조상에서 충족시키는 것에 관여된 행위와 관계”라고 정의했다.
이렇게 돌봄을 정의하면 사회적, 경제적 맥락을 들여다볼 수 있고 돌봄을 복수의 행위자가 관여하는 상호행위로 볼 수 있어 돌봄의 대상이 되는 ‘당사자’의 주권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 돌봄을 ‘타인에게 이전 가능한 행위’이자 노동으로 바라봄으로써, 그동안 페미니즘 이론에서 축적되어온 ‘부불노동’ ‘재생산노동’ 이론을 적용해 돌봄을 해석한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인 그답게 이 책은 인권과 페미니즘을 토대로 ‘돌봄’과 ‘돌봄노동’에 대한 탄탄하고 정교한 이론을 펼쳐 보인다.
그렇다면 좋은 돌봄이란 무엇인가. 흔히 좋은 돌봄이라고 하면 가족의 따뜻한 돌봄을 떠올리지만, 저자는 가족 돌봄은 ‘신화’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책은 일본의 민법 조항 등을 따져 가족 돌봄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음을 지적하고, 복지 관련 연구를 바탕으로 가족에 의한 고령자 돌봄 그 자체가 오히려 역사적으로 새로운 사회현상이라고 짚는다. “옛날에는 가족이 서로 잘 돌봤다”고 하는 담론은 ‘근거가 없는 신념의 집합’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당사자 주권’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저자는 돌봄의 질은 돌봄을 받는 쪽의 판정에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좋은 돌봄에 대한 기준으로, 집단 돌봄이 아닌 개별 돌봄, 시설 돌봄이 아닌 재택 돌봄, 시설 내 다인실 돌봄이 아닌 개인실 돌봄이라고 명확하게 제시한다. 다시 말해 당사자의 개별성에 대응하는 돌봄, ‘니즈’(needs)가 있는 당사자를 중시하는 돌봄이 좋은 돌봄이라는 것.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가족 돌봄은 ‘의존의 사적 영역화’다. 따라서 우리가 더 좋은 돌봄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비가족적인 돌봄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이때 돌봄 주체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국가나 시장, 제3의 영역(시민사회)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에노 지즈코의 차별성이 빛나는 ‘복지다원사회론’이 등장한다.
그가 말하는 복지다원사회론에서는 관(국가·지방자치단체), 민(시장), 협(시민사회), 사(가족) 부문이 모두 실패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네 주체가 분담과 협력을 해 좋은 돌봄을 위한 ‘최적의 혼합’을 찾아보자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복지다원사회를 이루는 최적의 답으로 1)사적 부문에서 돌봄을 선택할지 말지 선택의 자유가 있어야 하고, 2)돌봄의 사회화에서는 시장화를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3)돌봄 비용은 국가가, 4)돌봄 노동은 협 부문으로 배분하는 것을 제시한다.
저자는 특히 일본의 생협과 지방정부에서 고령자에게 좋은 돌봄을 제공하기 위해 선보인 다양한 복지모델 사례를 분석하고 소개한다. 특정 유형의 서비스 기관이 아니라 이용자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유형의 서비스를 한 기관에서 제공하는 ‘민가 활용형 소규모 다기능 공생 지역밀착 서비스’라든지 아동, 고령자, 장애인이 함께 ‘데이서비스’(주간 돌봄)를 이용하는 ‘공생 모델’, 내 집과 같은 분위기에서 임종을 맞이할 수 있는 ‘홈 호스피스’와 같은 시민사업체의 사례를 소개하고 그들의 성과와 한계를 분석한다. 생생한 현장 연구 사례들은 고령자 돌봄 모델에 대해 다양하게 구상해볼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늙고 병들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사회를 상상하도록 만든다.
2023년 한국 사회의 65살 인구는 전체 인구의 18.4%를 차지하고 있고, 노인 가구 가운데 자녀와 동거하는 가구는 20%에 불과하다. 한국은 2008년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를 통해 고령자 돌봄의 사회화를 꾀하고 있지만, 우에노가 말한 ‘당사자 주권’적 측면에서 본다면 정책적 대응과 사회적 인프라 모두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 책은 초고령 사회를 목전에 둔 한국 사회에 ‘복지다원사회’를 어떻게 모색하고 우리 현실에 맞춰 적용해볼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져준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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