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 X새끼’는 인종차별 표현이 될 수 없다” [책&생각]

한겨레 2024. 5. 31.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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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계 영국 철학 교수의 첫 책
‘문화 전쟁’에 던지는 비판적 질문들
“인종차별 본질은 역사적·구조적 차별”
분열로 이끄는 잘못된 논쟁 구도 해체
미국에선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흑인이 생명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진은 지난 2017년 미국의 시민단체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가 벌이고 있는 길거리 시위 모습. 멤피스/AFP 연합뉴스

우리에겐 논쟁이 필요하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이슈에 대해 말하는 법
아리안 샤비시 지음, 이세진 옮김 l 교양인 l 2만2000원

영국에서 전 국가대표 축구 선수가 음주운전으로 체포됐다. 흑인이었던 그는 체포 과정에서 술에 취해 경찰에게 “백인 x새끼”라는 욕을 했다. 이것은 백인이라는 인종을 비하하는 역인종차별로 볼 수 있을까?

영미권에서 ‘캐런’이라는 은어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생기면 윗사람을 부르라고 요구하는 중년의 중산층 백인 여성을 뜻한다. 즉 ‘진상 고객’인 백인 여성을 가리킨다. 이들은 특히 상대가 유색인종일 때 자신의 특권을 이용하려고 이같은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캐런’이라는 표현이 백인 여성에 한정돼 쓰인다는 이유로 성차별로 볼 수 있을까? 남아공에선 한때 여성들이 에스엔에스(SNS)에서 남성들의 무자비한 성폭력을 고발하면서 ‘남자는 쓰레기다’라는 해시태그를 달았고, 페이스북은 이를 혐오 표현으로 보고 정기적으로 삭제했다. 과연 ‘남자는 쓰레기다’는 ‘여자는 걸레다’와 같은 무게의 혐오 표현으로 볼 수 있을까?

‘우리에겐 논쟁이 필요하다’는 이처럼 첨예한 문제의 다층적인 겹겹을 한꺼풀 한꺼풀 풀어내며 논증해나간다. 이중 어떤 주제는 보수 대 진보로 단순하게 입장이 갈리기도 하지만, 어떤 주제는 진보 진영 안에서도 분열을 일으키는 질문들이다. 이 주제에 뛰어든 저자는 이슬람 가정에서 자란 비백인 여성이자 영국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먼저 ‘백인 x새끼’라는 표현이 역인종차별인지 알기 위해선 인종차별이 무엇인지부터 정의해야 한다. 인종차별이란, 성차별, 동성애 혐오, 장애인차별 등과 같은 ‘억압’의 한 형태다. 그렇다면 억압이란 무엇인가? 억압이란, 어떤 사람이 특정한 사회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하지 않은 부정적 대우를 받는 것이다. 또 그러한 대우는 오랜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구조화된 것으로, 그런 억압을 행한 개인의 인격이나 윤리성에만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없는 맥락이 있다.

그런 점에서 ‘백인 x새끼’라는 표현은 인종차별적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물론 듣는 사람이 당연히 기분이 상하고 모욕감을 느꼈겠지만, 인종차별이 성립하기 위한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억압이 없는 한, 일회성 욕설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백인이 얼굴을 검게 칠하는 흑인 분장(‘블랙페이스’)을 하고선 흑인을 조롱하는 연기를 하는 것은 인종차별이지만, 흑인이 백인 분장을 하고선 백인을 조롱하는 것을 같은 선상에 놓을 순 없다.

그렇다면 ‘캐런’이라는 은어는 어떻게 봐야 할까? 저자는 성차별인지 판단하기 위해 ‘교차성’이라는 개념을 가져온다. 한 개인의 정체성은 인종, 계급, 젠더가 복잡하게 중첩돼 있는데 이를 교차성이라고 한다. 특히 운동조직이 교차성을 예민하게 포착하지 않으면, 그 운동이 대상으로 하는 피억압 집단 안에서도 가장 특권적인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된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이 인종과 계급을 다루지 않는다면, 부유한 백인 여성의 요구에 가장 부응하게 된다. 백인 중산층 페미니스트의 고민이 자신의 자녀가 자라서 가부장제로 인한 피해를 보는 것이라면, 흑인 빈민 페미니스트의 걱정은 오늘 자신의 자녀가 귀가하다가 경찰에게 범죄자로 오인받아 살해당하는 것일 정도로 이들 간의 삶과 요구는 이질적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여성이라는 집단 내의 다층성, 이질성을 감안하고 볼 때, ‘캐런’은 아무 백인 여성 또는 모든 백인 여성을 겨냥하는 말이 아니다. 캐런은 ‘인종차별을 하는 백인 여성’을 말한다. 자신의 특권에 대한 충분한 확신이 있고, 그 특권을 행사해 다른 특정 집단에 불이익을 주더라도 자신은 무사하다는 걸 잘 아는 백인 여성이다. 백인 여성이라고 해도 성매매 여성이거나 트랜스젠더거나 빈민 여성들은 보통 윗사람이나 경찰을 부르라는 명령을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캐런은 백인 여성 중에서도 중산층 이성애자로, 자신의 주류성을 영악하게 이용하는 부류다. 백인 남성들이 직접적인 폭행이나 폭언으로 인종차별을 한다면, 캐런은 관리자, 경찰, 경비원 등 제3자를 동원해 인종차별을 한다. 그런 점에서, ‘캐런’은 성차별적 표현이 아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은어화된 것이 아니라, ‘인종차별’이라는 실체적인 행위를 타깃으로 은어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책은 이외에도 한국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는 이슈들을 다양하게 다룬다. 사사건건 정치적 올바름을 따지는 ‘워키즘’은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드는 행태인가? 소수자가 더 약한 소수자를 억압하는 것은 어떻게 볼 것인가? 예술가와 예술 작품은 분리해 봐야 할 것인가? 우리로 치자면 김기덕 영화감독이 ‘미투’를 당했다고 해서 그의 작품까지 봐서는 안 되는 걸까?

‘우리에겐 논쟁이 필요하다’의 지은이 아리안 샤비시. 아마존닷컴 갈무리

책은 아주 잘 벼린 칼로 살을 한점 한점 발라내어 등뼈를 드러내는 것처럼, 사안의 비본질을 하나씩 하나씩 걷어내어 실체와 본질을 드러낸다. 역사를 꿰뚫고 이론을 섭렵한 철학자답게 근거는 탄탄하고 논리는 정교하다. 하지만 저자가 종국적으로 정조준하는 문제는 차별과 억압이 아니다. 책의 칼날은 자본주의를 겨눈다. 이 모든 차별과 억압은 자본주의의 산물이자 동력일 뿐이다. 인간과 비인간을 분할통치하고, 인간 안에서도 다양다종하게 분할통치하는 것은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한 효율적 전략이다. 남반구의 빈곤, 굶주림부터 어린이 노동, 성적 괴롭힘, 동성애 차별, 동물 학대, 북극곰의 눈물과 기후위기까지 이 모든 문제의 뿌리는 자본주의다. 저자는 일갈한다. ‘자본주의는 글렀고, 우리는 다 죽게 생겼다!’고.

책이 마지막으로 당도하는 곳은 ‘그래서 지금 우리는 무얼 해야 되는가’이다. ‘지구가 당장 망하게 생겼는데, 오늘 내가 생수병의 라벨을 떼서 재활용 분리수거를 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저자의 사유가 이 책의 클라이맥스다. 이론적이지만 실천적이고, 철학적이지만 실용적이고, 절망적이지만 희망적인, 책의 매력은 이 클라이맥스에 있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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