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재원의 정치평설] ‘당원 중심주의’의 함정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29일 당원권 강화를 위한 당헌·당규 개정방침을 밝혔다. 이른바 ‘당원 중심주의’ 또는 ‘당원 주권주의’ 실천 방안이 담겼다. 당장 ‘전국대의원대회’로 불려온 전당대회 명칭을 ‘전국당원대회’로 바꾸기로 했다. 중앙당엔 ‘당원 주권국’을 두기로 했다.
정작 눈길이 가는 대목은 따로 있다. 이제껏 의원들끼리 해온 국회의장단과 원내대표 선출 방식의 변경이다. 권리당원 투표 20%를 반영키로 한 것. 사실 이번 조치는 최근 당내 국회의장 경선 후폭풍으로 이뤄졌다. ‘개딸’ 등 강성 당원들이 밀었던 추미애 당선자의 탈락. 이에 실망한 당원들의 대거 탈당. 깜짝 놀란 친명계 주류가 급히 대책을 마련했다. 바로 원내직 선출에도 당원 표심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물론 비명계를 중심으로 신중론도 만만찮았다. 우상호 전 원내대표는 원칙 훼손 우려를 들었다. “당직은 당원이 뽑고, 선출직 공직자는 민심을 반영해 뽑고, 원내직은 국회의원이 뽑는 게 오랫동안 정착해 온 (당의) 원칙이다.” 하지만 이재명 대표 생각은 분명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당원 중심 대중정당으로 확실히 변모시키자.” 당원권 강화 방안이 보고된 29일 최고위원 회의.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당원이 주인인 정당’. 사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말은 아니다. ‘깨어 있는 시민’의 정치 참여. 지난 2003년 열린우리당의 창당 목표였다.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의 꿈이기도 했다. 오랜 우리 정당의 망령인 제왕적 총재의 일인 지배, 지역 구도에 의존한 ‘땅 따 먹기’ 정치, 명망가 위주 공천. 당원 중심주의로 혁파하자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이 대표는 ‘노무현 정신’을 지난 23일 그의 서거 15주기 기념일에 재차 소환했다. 당원 중심 정당이 “우리가 반드시 나아가야 할 미래”라고 말했다. 특히 당원 수가 수백만 명인 점을 강조했다. “촛불 혁명으로 나타난 우리 국민의 민중적인 DNA가 민주당의 권리당원 수백만 명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민주당 당심과 민심 일치를 은근슬쩍 강조했다.
중앙선관위에 따르면 지난 2021년 말 기준으로 민주당 당원 수는 485만 명. 당비를 내는 권리당원은 129만 명에 달한다. 현재는 당원이 500만 명. 권리당원은 2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민심 상당 부분을 대변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해 국민의힘 당원 수도 407만 명. 여기다 군소정당까지 보태면 당적 가진 국민 수는 1043만 명에 달했다. 인구 대비 20.2%였다. 반면 200년 넘는 정당 역사를 지닌 영국 보수당의 당원 수는 기껏 20만 명. 노동당은 50만 명 수준. 당원으로 활동하는 영국인이 2%도 채 안 된다는 얘기다. 민주주의 후발국인 한국이 원조국보다 정당 참여율이 10배나 높은 상황.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지난해 국회 미래연구원이 펴낸 ‘만들어진 당원’이란 보고서가 있다. 여기에 우리 정당의 불편한 민낯이 낱낱이 드러난다. 첫째 ‘당원 아닌 당원’이 절대 다수라고 주장한다. 근거의 하나로 민주당 광주시당의 지난해 2월 조사를 들었다. 전체 당원 15%인 6만 명을 선별 조사한 결과, 지역구별로 많게는 ‘유령 당원’이 95%에 달했다. 이에 따라 등록 당원 중 최소 3분의 2 이상을 허수로 추정했다.
둘째 ‘매집된 당원’이다. 공천 받으려는 지인에 의해 동원된 사람들을 일컫는다. 지난 총선 때 민주당 경선 룰은 일반시민 50%, 권리당원 50% 비율의 ARS 투표방식. 상대보다 더 많은 권리당원을 모은 후보가 절대 유리하다. 저마다 열띤 당원 매집으로 당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2021년 기준으로 권리당원은 전체의 26.5%. 이 중 얼마나 매집된 것인지 알 순 없다. 적잖은 수로 추정될 뿐이다. 이들은 도와 달라는 지인에게 표만 줄뿐 그 이상엔 관심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당심을 좌지우지하는 세력은 ‘지배하려는 당원’이다. 보고서가 꼽은 세 번째 유형의 당원. 상당수가 자발적으로, 주로 온라인으로 입당한다. 참여 의지가 강하고 그만큼 목소리도 크다. 당연히 자신들의 뜻에 따라 당이 굴러가길 바란다. 특히 유력 대선주자를 중심으로 강한 ‘팬덤’을 형성한다. 그래서 자기 ‘팬덤 리더’에겐 무한 충성을, 반대편에 대해선 강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실제 이들의 파워는 지난 공천 경선에서 확인된 바 있다. 이른바 ‘비명횡사, 친명횡재’. 겉과 속이 다른 ‘수박’으로 낙인찍힌 비명(비이재명)계는 다선 중진이라도 추풍낙엽이었다. 이를 통해 사실상 당을 ‘지배’하게 된 팬덤 당원들. 이제 국회의장 선출까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게 됐다.
온라인 입당에 의한 당원 증가, 소셜미디어를 동원한 당원 목소리 증폭, 사이버 공간에서의 대규모 세 과시. 어쩌면 IT 발달에 따른 자연스러운 정치 변화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형성된 팬덤 당원이 보이는 배타성과 극단성이다. 조금만 생각이 달라도 응징과 타도의 대상으로 내몬다. 여기다 여러 플랫폼에서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무비판적 확증 편향만 키워나간다. 이렇게 힘을 키운 당원들에 의해 지배되는 정당. 과연 민심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을까. 내로남불 ‘조국 사태’에도 끝까지 그를 옹호하다 정권을 넘겨줬던 민주당. 이번엔 당원 중심주의 함정에 빠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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