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한국 생활 이렇게 끝내야 하나

이영빈 기자 2024. 5. 31.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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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농구 KCC 라건아 계약 논란

“국가가 부르면 언제든 갈 준비가 돼 있지만, 저를 더는 원하지 않는 것 같네요.”

귀화 농구 선수 라건아(35·부산 KCC)는 최근 이 같은 심경을 전했다. 그는 미국인이었던 2012년 미주리대를 졸업하고 한국 무대에 뛰어들었다. 당시 이름은 리카르도 래틀리프.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국농구연맹(KBL)에서 12년을 뛰었다. 한국에 정이 들면서 2018년 특별 귀화와 함께 용인 라씨 시조가 됐고 태극 마크도 달았다. 지난 2월엔 귀화 선수로는 처음으로 한국 국가대표 주장도 맡았다.

KCC 라건아는 한국 국가대표 주장이지만 다음 시즌부터는 '외국 선수'로 분류되면서 한국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가능성이 커졌다. /KBL

그런데 지금 그는 한국을 떠나야 할 처지다. 태극 마크도 반납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기묘한 국면이 나타난 건 독특한 그의 신분 때문이다. 라건아는 한국 국적을 얻은 뒤 KBL에서는 ‘귀화 선수’로 특별 분류됐다. 라건아만을 위한 제도였다. 그러니까 팀당 2명으로 제한한 외국(외국 국적) 선수 정원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국내(한국 국적) 선수로도 대우하지 않는다. 형식적으로는 한국 국적이긴 하지만(정확히는 이중 국적) 국내 선수 신분으로 뛰기엔 외국 선수만큼 기량이 뛰어나다 보니 팀 간 형평성 차원에서 라건아는 외국 선수와는 동시에 코트에 나설 수 없게 했다.

문제는 라건아가 특별귀화와 함께 맺었던 소속팀(KCC) 계약이 31일 종료되면서 시작됐다. 지난 17일 KBL 10개 구단 단장들은 이사회를 통해 라건아 신분을 ‘외국 선수’로 결정했다. ‘귀화 선수’가 더 이상 아니다. 그럼 외국 선수 인원 제한(팀당 2명)에 앞으론 포함된다. 라건아는 나이가 들면서 기량이 점점 쇠퇴했다. 경기당 평균 20득점 10리바운드를 훌쩍 넘기던 시절에서 지난 시즌엔 15.6점 8.4리바운드에 그쳤다. 외국 선수가 아니라면 이 역시 준수한 성적이지만 외국 선수라면 얘기다 다르다. 외국 선수 쿼터를 희생해가면서까지 그에게 비싼 연봉을 줄 팀은 없다. 더 잘하는 젊은 외국 선수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외국 선수에 포함하지 않는 ‘귀화 선수’일 때 그 가치가 살아나지만 각 구단은 그를 계속 ‘귀화 선수’로 놔두면 그를 데려가는 특정 팀만 이득을 본다는 판단 아래, 아예 그를 사실상 축출하기로 한 셈이다. 농구계에서 “비겁한 담합”이라고 비판하는 이유다.

그래픽=이철원

라건아는 여러모로 복잡한 환경에 얽혀 있다. 팀들이 라건아 영입을 꺼리는 이유는 노쇠한 기량뿐 아니라 그가 국가대표라는 점도 작용했다. 라건아가 국가대표로 나갈 때 대표팀 출전 수당은 소속 구단에서 대신 내고 있다. 연봉 외에 추가 부담이 따르는 선수란 얘기다. 이번 기회에 라건아를 완벽한 한국인, ‘국내 선수’로 인정해주자는 주장도 있었다. KBL 역대 득점 2위(1만1343점)와 리바운드 1위(6567개)라는 금자탑에 2018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따는 등 국가대표로서 이룬 업적도 고려하자는 취지. 그러나 결국 이 주장은 관철되지 않았다.

라건아는 대리인을 통해 서운한 감정을 전했다. 대리인은 “라건아는 본인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이 있다. 특별 귀화로 받아온 대표팀 수당이 없어지는 것도 각오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렇게 상의도 없이 10개 구단이 일방적으로 ‘외국 선수’라고 결정해 버리니 아쉬울 따름이다”라고 했다.

현재 라건아는 한국에서 더 이상 못 뛰게 될 경우를 대비해 일본 진출을 타진하고 있다. 라건아가 일본으로 떠나면 대표팀에서 뛰는 게 어려워진다. 국내에 있을 때는 대한농구협회가 KBL과 일정을 조율한다. 하지만 해외로 나가면 협의가 쉽지 않다. 이현중(일라와라 호크스), 여준석(곤자가대) 등 해외파들이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럽과 남미 국가대표들을 상대로 경기당 10리바운드 정도를 따낼 수 있는 센터는 국내엔 라건아뿐이다. 라건아는 6년 동안 국가대표로 44경기에 나서서 평균 22.4점 11.6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대한농구협회(KBA)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다. 농구계 관계자는 “대표팀을 관리하는 협회가 나서서 양측을 조율해야 했다”면서 “국가대표 주장이 떠나야 하는 상황이 왔는데 협회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라건아 측 역시 “협회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협회 관계자는 “(라건아 문제에 대해) 내부에서 계속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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