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 古典을 옮기는 남자, 서울에 체호프의 ‘벚꽃동산’을 꾸미다
“한국에 와서 한국 배우들과 연극한다고 얘기하면 다른 나라 예술가 친구들이 다들 부러워해요. 그런데 한국은 스스로의 문화를 과소평가하는 거 같아요.”
영국·네덜란드 국립극장, 프랑스 파리 오페라,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단 오페라 등 최고의 극장에서 창작 작업을 해온 사이먼 스톤(40)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젊은 연출가로 첫손에 꼽힌다. 내달 4일 개막을 앞두고 강서구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전도연·박해수 등 우리 배우들과 연극 ‘벚꽃동산’ 연습이 한창인 그를 최근 만났다. ‘가장 잘나갈 때’ 한국에 온 이유를 묻자, 그는 “한국 문화는 지금이 전성기이고, 나도 그 속에 들어가 일부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한국 문화, 지금이 전성기”
“그리스 비극의 걸작은 기원전 특정 시기 80여 년간 서로를 베끼며 대부분 탄생했어요. 독일의 실러와 괴테도, 영국의 셰익스피어도 다른 작가들의 아이디어를 서로 훔쳐가며 창작했죠. 한 나라의 문화적 전성기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저는 한국이 지금 바로 그런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세계 최고의 예술가들이 한국에 와서 창작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겁니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독일, 영국을 거쳐 호주에서 성장한 그는 “17세 때 호주 영화제에서 영화 ‘올드보이’를 보고 푹 빠져버렸다”는 소문난 ‘K컬처’ 팬. “집의 책장 하나가 한국 영화·드라마와 관련 서적으로 가득 차 있다”고도 했다.
스톤은 전 세계를 다니며 그리스 비극부터 실러, 입센, 체호프 등의 고전을 그 나라의 현재를 배경으로 재창작하는 작업 방식으로 유명하다<그래픽>. 그는 “새로운 도시에 가면 나는 머릿속 고전 수백 편 중 어떤 작품이 이 도시와 사람들에게 가장 잘 어울릴지 연구하는 과학자가 된다”고 했다. 그가 한국을 위해 선택한 작품이 현대 연극의 비조(鼻祖)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벚꽃동산’인 점은 의미심장하다.
원작은 구체제 붕괴 직전의 19세기 혁명 전야 러시아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벚꽃동산 저택의 주인인 몰락 귀족 부인과 그녀를 동경했던 농노의 아들이었으나 기업가로 자수성가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다. 현대 서울을 무대로 옮겨 온 한국판 벚꽃동산에선 전도연이 귀부인 송도영, 박해수가 기업가 청년 황두식 역할이다. 스톤은 “한국은 여전히 존댓말을 쓰는 사회적 위계질서가 살아있고, 정치적 격동, 기적적 경제 성장, 기술 발전과 민주주의 확대 등 빠른 변화를 겪었다. ‘벚꽃동산’을 현대 배경으로 재창작할 때 젊은이들이 전통과 격렬하게 충돌하는 지금의 한국보다 더 걸맞은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전통·현대 충돌 현대판 벚꽃동산
“서구에서는 ‘벚꽃동산’이 희극이냐 비극이냐를 놓고 논란이 있어요. 독일에선 비극, 영국에선 희극이라고 할까요. 배우가 대사 단 한 줄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서도 희·비극 사이를 오갈 수 있습니다.” 이 점 역시 그에겐 “희비극적 요소를 빠르게 오가는 능력이 세계 최고라는 점이 K콘텐츠로 이미 증명된” 한국 배우들에게 ‘벚꽃동산’이 딱 어울린다고 확신하게 된 계기다. 배우 전도연을 “한국의 메릴 스트리프,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극찬한 그는 박해수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섹시하고 완벽하게 광대다. 그만큼 강하면서 동시에 약한 배우는 본 적이 없다. 한국의 말런 브랜도”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스톤은 올리는 공연마다 평단의 찬사와 흥행 성공을 동시에 거둬왔다. 그에게 고전의 세계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처럼 새롭게 풀어낼 이야기를 지닌 영웅들로 가득 찬 세계”다.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주인공 비올레타는 원작에서 ‘파리 사교계의 꽃’인 고급 매춘부였다가 순수한 귀족 청년과 비극적 사랑에 빠지지만, 그가 프랑스 국립 파리 오페라 극장에 올린 오페라에선 매일 밤 파티를 옮겨 다니는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 모델이 됐다. 황량한 스페인 시골 여인의 모성(母性)에 대한 집착을 이야기했던 스페인 작가 로르카의 ‘예르마’는 스톤이 영국 런던 국립극장에 올릴 때 현대 런던 여성 이야기로 바뀌었다.
남편 테세우스왕이 페르세포네의 뒤를 쫓아 명계(冥界)로 사라진 뒤 그 전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 히폴리투스를 욕망하게 된 ‘페드라’ 는 스톤에 의해 젊은 시절 모로코 애인을 꼭 닮은 그의 아들을 욕망하게 된 현대 영국의 여성 정치인으로, 질투에 눈이 멀어 두 자식을 살해한 마녀 ‘메데아’는 네덜란드 국립극장에서 자신의 연구실 조수였으나 연구 성과를 훔치고 젊은 여자와 불륜에 빠진 남편을 죽이려 한 제약사의 여성 생화학자가 됐다. 스톤은 이 작품들도 나라와 도시가 바뀔 때마다 그에 맞춰 재창작한다.
공연 1주일 전까지도 연습을 거듭하며 매일 ‘쪽대본’을 써서 연극 내용을 계속 바꾸는 작업 스타일로도 유명하다. “한국에선 배우들이 시간이 더 필요하다기에 일찍 작업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결국 내 말이 옳았어요. 관습적인 ‘테이블 리딩(배우들이 탁자에 앉아 공연처럼 대본을 읽는 것)’ 없이도, 우린 3주 차부터 ‘런(연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실제처럼 이어 연습하는 것)’을 돌았으니까요.”
◇”’쪽대본’ 작업 이유는 현장성”
그는 “혼돈(chaos)을 사랑하는 배우를 원한다”고도 했다. “연출가가 배우에게 줄 가장 큰 선물은 한계를 미리 판단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배우는 완전한 자기 자신이 되고, 다른 누구와도 해본 적 없는 일을 할 수 있죠. 당신이 사랑에 빠질 때와 똑같이요.”
그가 이런 작업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연극이 매일매일 마치 즉흥인 것처럼 무대 위에 살아있길 원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관객이 대본이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모든 것이 하나의 이벤트처럼 느껴지길 바랍니다. 배우가 즉흥으로 연기한 것인지 내가 쓴 대본을 말하는 것인지 구별할 수 없을 수준에 이른다면 정말 좋은 작품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는 “연습과 공연을 할 때마다 ‘아, 지금 저 조명이 확 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고도 했다. “그런 돌발 사태가 벌어지면 완전히 다른 상황,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테니까요. 나도 전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배우가 연기할 때 전율을 느낍니다. 영화와 연극이 다른 것은 바로 그 라이브 무대의 즉흥성과 현장의 공기죠.” 공연은 7월 7일까지, 4만~1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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