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 古典을 옮기는 남자, 서울에 체호프의 ‘벚꽃동산’을 꾸미다

이태훈 기자 2024. 5. 31.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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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온 가장 뜨거운 연출가 사이먼 스톤
연극 '벚꽃동산'의 연출가 사이먼 스톤은 "새로운 도시에 가면 나는 머릿속 고전 수백 편 중 어떤 작품이 이 도시와 사람들에게 가장 잘 어울릴지 연구하는 과학자가 된다"고 했다. "연출가가 배우에게 줄 가장 큰 선물은 한계를 미리 판단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배우는 완전한 자기 자신이 되고, 다른 누구와도 해본 적 없는 일을 할 수 있죠. 당신이 사랑에 빠질 때와 똑같이요." /LG아트센터, 사진가 요한 페르손·스테파니 버거·샤를 듀프라

“한국에 와서 한국 배우들과 연극한다고 얘기하면 다른 나라 예술가 친구들이 다들 부러워해요. 그런데 한국은 스스로의 문화를 과소평가하는 거 같아요.”

영국·네덜란드 국립극장, 프랑스 파리 오페라,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단 오페라 등 최고의 극장에서 창작 작업을 해온 사이먼 스톤(40)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젊은 연출가로 첫손에 꼽힌다. 내달 4일 개막을 앞두고 강서구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전도연·박해수 등 우리 배우들과 연극 ‘벚꽃동산’ 연습이 한창인 그를 최근 만났다. ‘가장 잘나갈 때’ 한국에 온 이유를 묻자, 그는 “한국 문화는 지금이 전성기이고, 나도 그 속에 들어가 일부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한국 문화, 지금이 전성기”

“그리스 비극의 걸작은 기원전 특정 시기 80여 년간 서로를 베끼며 대부분 탄생했어요. 독일의 실러와 괴테도, 영국의 셰익스피어도 다른 작가들의 아이디어를 서로 훔쳐가며 창작했죠. 한 나라의 문화적 전성기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저는 한국이 지금 바로 그런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세계 최고의 예술가들이 한국에 와서 창작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겁니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독일, 영국을 거쳐 호주에서 성장한 그는 “17세 때 호주 영화제에서 영화 ‘올드보이’를 보고 푹 빠져버렸다”는 소문난 ‘K컬처’ 팬. “집의 책장 하나가 한국 영화·드라마와 관련 서적으로 가득 차 있다”고도 했다.

스톤은 전 세계를 다니며 그리스 비극부터 실러, 입센, 체호프 등의 고전을 그 나라의 현재를 배경으로 재창작하는 작업 방식으로 유명하다<그래픽>. 그는 “새로운 도시에 가면 나는 머릿속 고전 수백 편 중 어떤 작품이 이 도시와 사람들에게 가장 잘 어울릴지 연구하는 과학자가 된다”고 했다. 그가 한국을 위해 선택한 작품이 현대 연극의 비조(鼻祖)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벚꽃동산’인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래픽=송윤혜

원작은 구체제 붕괴 직전의 19세기 혁명 전야 러시아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벚꽃동산 저택의 주인인 몰락 귀족 부인과 그녀를 동경했던 농노의 아들이었으나 기업가로 자수성가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다. 현대 서울을 무대로 옮겨 온 한국판 벚꽃동산에선 전도연이 귀부인 송도영, 박해수가 기업가 청년 황두식 역할이다. 스톤은 “한국은 여전히 존댓말을 쓰는 사회적 위계질서가 살아있고, 정치적 격동, 기적적 경제 성장, 기술 발전과 민주주의 확대 등 빠른 변화를 겪었다. ‘벚꽃동산’을 현대 배경으로 재창작할 때 젊은이들이 전통과 격렬하게 충돌하는 지금의 한국보다 더 걸맞은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전통·현대 충돌 현대판 벚꽃동산

“서구에서는 ‘벚꽃동산’이 희극이냐 비극이냐를 놓고 논란이 있어요. 독일에선 비극, 영국에선 희극이라고 할까요. 배우가 대사 단 한 줄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서도 희·비극 사이를 오갈 수 있습니다.” 이 점 역시 그에겐 “희비극적 요소를 빠르게 오가는 능력이 세계 최고라는 점이 K콘텐츠로 이미 증명된” 한국 배우들에게 ‘벚꽃동산’이 딱 어울린다고 확신하게 된 계기다. 배우 전도연을 “한국의 메릴 스트리프,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극찬한 그는 박해수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섹시하고 완벽하게 광대다. 그만큼 강하면서 동시에 약한 배우는 본 적이 없다. 한국의 말런 브랜도”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걸작 희곡 ‘벚꽃동산’을 현재의 서울 배경으로 옮겨 무대에 올리는 연출가 사이먼 스톤(오른쪽)이 원작의 러시아 몰락 귀족 귀부인 '류바'의 한국적 재해석 캐릭터 '송도영' 역할로 출연하는 배우 전도연(왼쪽) 등과 함께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LG 아트센터

스톤은 올리는 공연마다 평단의 찬사와 흥행 성공을 동시에 거둬왔다. 그에게 고전의 세계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처럼 새롭게 풀어낼 이야기를 지닌 영웅들로 가득 찬 세계”다.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주인공 비올레타는 원작에서 ‘파리 사교계의 꽃’인 고급 매춘부였다가 순수한 귀족 청년과 비극적 사랑에 빠지지만, 그가 프랑스 국립 파리 오페라 극장에 올린 오페라에선 매일 밤 파티를 옮겨 다니는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 모델이 됐다. 황량한 스페인 시골 여인의 모성(母性)에 대한 집착을 이야기했던 스페인 작가 로르카의 ‘예르마’는 스톤이 영국 런던 국립극장에 올릴 때 현대 런던 여성 이야기로 바뀌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그리스 비극 원작 '페드라'(2023)와 '메데아'(2014 등), 20세기 초 스페인 희곡 원작 '예르마'((2017 등), 베르디 오페라 원작 '라 트라비아타'(2019·프랑스 등). /사진가 요한 페르손·딤 발셈·스테파니 버거·샤를 듀프라·

남편 테세우스왕이 페르세포네의 뒤를 쫓아 명계(冥界)로 사라진 뒤 그 전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 히폴리투스를 욕망하게 된 ‘페드라’ 는 스톤에 의해 젊은 시절 모로코 애인을 꼭 닮은 그의 아들을 욕망하게 된 현대 영국의 여성 정치인으로, 질투에 눈이 멀어 두 자식을 살해한 마녀 ‘메데아’는 네덜란드 국립극장에서 자신의 연구실 조수였으나 연구 성과를 훔치고 젊은 여자와 불륜에 빠진 남편을 죽이려 한 제약사의 여성 생화학자가 됐다. 스톤은 이 작품들도 나라와 도시가 바뀔 때마다 그에 맞춰 재창작한다.

공연 1주일 전까지도 연습을 거듭하며 매일 ‘쪽대본’을 써서 연극 내용을 계속 바꾸는 작업 스타일로도 유명하다. “한국에선 배우들이 시간이 더 필요하다기에 일찍 작업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결국 내 말이 옳았어요. 관습적인 ‘테이블 리딩(배우들이 탁자에 앉아 공연처럼 대본을 읽는 것)’ 없이도, 우린 3주 차부터 ‘런(연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실제처럼 이어 연습하는 것)’을 돌았으니까요.”

◇”’쪽대본’ 작업 이유는 현장성”

연극 '벚꽃동산'의 연출가 사이먼 스톤. /이태훈 기자

그는 “혼돈(chaos)을 사랑하는 배우를 원한다”고도 했다. “연출가가 배우에게 줄 가장 큰 선물은 한계를 미리 판단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배우는 완전한 자기 자신이 되고, 다른 누구와도 해본 적 없는 일을 할 수 있죠. 당신이 사랑에 빠질 때와 똑같이요.”

그가 이런 작업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연극이 매일매일 마치 즉흥인 것처럼 무대 위에 살아있길 원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관객이 대본이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모든 것이 하나의 이벤트처럼 느껴지길 바랍니다. 배우가 즉흥으로 연기한 것인지 내가 쓴 대본을 말하는 것인지 구별할 수 없을 수준에 이른다면 정말 좋은 작품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는 “연습과 공연을 할 때마다 ‘아, 지금 저 조명이 확 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고도 했다. “그런 돌발 사태가 벌어지면 완전히 다른 상황,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테니까요. 나도 전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배우가 연기할 때 전율을 느낍니다. 영화와 연극이 다른 것은 바로 그 라이브 무대의 즉흥성과 현장의 공기죠.” 공연은 7월 7일까지, 4만~1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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