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복의 일상 그 너머] 3. 정원 가꾸기는 ‘자발적 노예’ 생활
정원 가꾸기 첫 삽 올리브나무
연두색 꽃망울·작은 열매 결실
플랜테리어 욕심 유리온실 조성
배수·잡초 등 초보집사 애태워
겨울철 보온 안 돼 불 지피기도
흙 만지는 일, 부지런한 삶 위로
넓은 정원은 주인을 ‘자발적 노예’로 고용하곤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일하는데 보수는 없다. 내 것을 가꾸는 재미가 노동의 원천이다. 이것이 자발적 노예의 특성이다.
온라인 중고거래 시장 당근마켓에서 산 올리브나무가 시작이었던가. 강릉으로 이주하면서 대형 토분에 담긴 올리브나무 두 그루도 따라나섰다. 지중해식 식단에서 시작된 올리브에 관한 관심은 관상용 나무를 기르면서 더욱 커졌다. 은회색을 띤 길쭉한 녹색 이파리들은 기품이 있고 우아했다. 길러보니 다른 식물에 비해 덜 예민했다. 가뭄에도 강해 물도 열흘에 한 번쯤 주면 됐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는 몇백 년 된 나무도 열매를 맺을 정도로 장수 DNA도 지녔단다.
지난해 2월, 아직 찬 바람이 쌩쌩 부는 어느 날 평택의 올리브 농장으로 향했다. 큰 농장이나 대형 화원에 들어서면 기분이 좋아진다. 식생에 적합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데다 그 안의 꽃과 나무들은 저마다의 색과 향으로 에너지를 발산하기 때문이다. 높이 4m쯤 되는 비닐하우스 바닥에는 수확한 올리브 열매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열매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고 물었더니 식품회사나 화장품 회사에 판다고 했다.
나도 내가 기른 나무에서 올리브를 따 먹을 수 있을까. 기대감은 짧은 순간 쑥쑥 자라났다. 대형 선풍기에 올리브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대로 내 마음도 춤을 추었다. 차 트렁크와 뒷좌석에 키 50cm 안팎의 어린나무를 잔뜩 싣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야 나는 우리 집에 온실이 없다는 현실과 마주했다. 녀석들은 두 달쯤 우리 집 욕실을 차지했다. 플랜테리어를 위해서도 온실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럴듯한 명분을 확보한 셈이었다.
마침 골프에 대한 흥미를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골프 칠 돈으로 식물을 사고 온실을 지으면 명분과 실리를 다 살리겠다 싶었다. 지난해 4월 중순 마침내 아담한 유리온실을 완성했다. 새집으로 이사한 올리브 나무들은 달포쯤 지나자, 좁쌀만한 연두색 꽃망울을 주렁주렁 피워냈다. 처음 보는 올리브 꽃의 기분 좋은 경험은 작은 열매 몇 개로 이어졌다. 나무가 너무 어려 중간에 다 떨어졌지만, 가능성을 본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건물과 식물은 네 계절을 지내봐야 안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여름이 되자 온실 문을 활짝 열어 놓아도 실내온도가 40도를 넘기도 했다. 겨울이 되니 더 큰 걱정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온실이 찬바람은 막아주지만 보온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부랴부랴 자그마한 화목난로를 하나 놨다. 땔감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굵은 참나무 장작을 하나 넣으면 두 시간쯤 탔다. 하지만 불이 꺼지면 온실은 금세 냉방이 되었다. 녀석들이 얼어 죽을까 하는 걱정에 새벽에 일어나 불을 지핀 적도 여러 번이었다. 소형 온풍기까지 투입했으나 영하의 기온을 되돌리기는 어려웠다. 빨리 겨울이 갔으면…. 봄만이 희망이었다. 환경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식물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수고스러운지 절감한 시간이었다.
삶이란 어제 같은 오늘이 이어지는 가운데 돌출변수가 끼어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결같은 삶은 지나친 이완을 낳을 수 있다. 의도적인 변화나 도전이 필요한 이유다. 도시에서의 오랜 직장생활 뒤 고향에서 전원생활을 시도한 것이 그랬다. 카톡 대문의 한 줄 멘트도 ‘another life’ 라고 적었다. 또 다른 삶이란 문구에 맞게 향후 삶의 큰 방향은 지금껏 해보지 않았던 일에 도전하는 것으로 정했다. 김치를 담고 승마를 배우고 발레학원도 몇 달 다녔다. 집을 지으면서 정원은 내가 직접 꾸며 보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런 차원에서였다. 핀터레스트란 앱을 알게 됐다. 아름다운 정원이란 단어를 입력하면 세상의 근사한 정원은 다 사진으로 보여주었다. 눈으로 익히고, 종이에 대강의 아웃라인을 그리는 일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베트남 화산석을 주문하고 양재동 꽃집 사장님의 조언을 받아 가며 꽃과 나무를 골랐다.
완전 초보였지만 손가락 마디를 저려가며 정원을 만들고 보니 그럴듯했다. 앞집이 3000만 원을 들여 정원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내심 뿌듯했다. 난 3분의 1도 안 들였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뒤에 터져 나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가 나빠지는 녀석들이 눈에 보였다. 수형 좋은 박태기나무가 1년쯤 지나자 싹 틔우는 법을 잊고 깡마른 뼈대를 드러냈다. 주목도, 자엽안개나무도 점점 시들어갔다. 초보 식물 집사는 손쓸 방법을 몰라 애만 태웠다. 생명이 스러져가는 걸 지켜보는 건 힘든 일이다. 사람이 그렇고 반려동물이 그렇고 식물도 그렇다.
토양이 문제였다. 흙에 뿌리를 박고 사는 데 그 흙에 문제가 있으니 온전히 생장할 수 없었다. 집을 지을 때 50㎝만 파도 딱딱한 진흙이 나오는 걸 보았다. 그래서 대지 위에 30㎝ 정도 새 흙을 얹고 정원을 꾸몄다. 그 정도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비가 와서 물이 빠지지 않아 뿌리를 썩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잡초는 왜 그렇게 잘 자라는지. 한여름엔 돌아서면 한 뼘씩 자라는 것 같았다. 정원 가꾸는 일에 서서히 지쳐갈 즈음 이사 올 때 선물 받은 책 한 권을 펼쳐 들었다.
“우리 부부와 일을 도와주는 노인 한 분, 이렇게 셋이서 3500평이나 되는 밭을 온종일 기어다닌다.”
책 앞부분에서 이런 대목을 읽고 의구심이 들었다. 셋이 돌보기엔 너무나 넓은 땅이었다. 일본인이 쓴 ‘전원의 쾌락’이란 책이었는데, 이런 제목이 온당한가 싶었다. 그런데 몇 장 뒤에 나온 이런 실토가 나를 위로했다.
“하루 종일 노예처럼 일한 다음, 자 이제부터 귀족이 되어 볼까 하는 순간 눈꺼풀이 감기고 잠으로 곯아떨어지는 생활의 연속이다.”
필자도 아침 일찍부터 설친 날에는 9시 전에 잠자리에 들 때가 있다. 괜한 고생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래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니 잡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언제나 할 일이 있다는 것도 축복이다. 흙을 만지고 밟으며 푸른 생명을 건사하는 일은 여전히 근사한 취미다.
컬쳐랩 심상 대표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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