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전쟁과 레드카펫

김지원 기자 2024. 5. 31.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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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지난 20일 열린 제 77회 칸 영화제 레드카펫에서 포즈를 취하는 모습/AP 연합뉴스

최근 ‘디지털 단두대’라는 신조어가 미국 소셜미디어를 휩쓸었다. MZ 세대들이 가자지구 전쟁에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는 유명 인사들을 소셜미디어에서 차단하는 것을 뜻한다.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전쟁과 관련 없는 연예인들에게 굳이 “목소리를 내라”고 압박할 필요가 있나.

발단은 6일 열린 미 패션계 최대 행사 ‘멧 갈라(Met Gala)’였다. 매년 5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리는 행사인데, 전 세계 유명 인사들이 그해 드레스 코드에 맞춰 기상천외한 복장을 입고 참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해도 내로라하는 할리우드 스타들이 화려한 모습으로 레드카펫에 등장했다. 수퍼 모델 지지 하디드는 1만3500시간을 들여 수작업했다는 톰 브라운의 입체 드레스를 입고 자태를 뽐냈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멧 갈라가 열리기 몇 주 전부터 미국 젊은 층 사이에서는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민간인 사망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격퇴하는 것을 넘어 가자지구 내 민간인들의 삶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 주장이다. 미 전역의 주요 대학 캠퍼스에서는 경찰이 친(親)팔레스타인 학생 시위대와 충돌하는 등 극심한 혼란이 빚어졌다. 멧 갈라 당일,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피란민들이 몰려있는 ‘최후의 도시’ 라파 공습을 개시하자 소셜미디어에는 극명히 대비되는 두 장소의 사진이 실시간으로 공유됐다. 조명이 번쩍거리는 화려한 레드카펫과 수레에 짐을 싣고 지친 얼굴로 또다시 피란을 떠나는 가자의 주민들. 미 NBC 방송은 “멧 갈라의 화려함이 이스라엘의 군사작전과 동시에 일어나면서 (대중의) 환멸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했다.

어떤 기대나 환상이 깨졌을 때 느끼는 괴로움을 우리는 환멸이라 칭한다. 어쩌면 미국 젊은이들은 환상적인 레드카펫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물론 멧 갈라에 참석한 유명인들은 초대장을 받았으니 간 것이고, 그게 그들의 일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가자지구의 참상에 대한 직접적 책임을 묻는 것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말을 할지 말지는 개인의 자유인데, ‘디지털 단두대’가 보여주기식 깨어있음(WOKE)을 강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든다. 그러나 이렇게 묻고 싶기도 하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완전히 모른 척하고 호화로운 ‘우리만의 축제’를 즐기는 것은 과연 정의로운가.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 무력히 죽어가는 다른 인간을 걱정하는 마음, 그러니까 ‘인류애’를 드러내주길 기대하면 안 되는 건가.

지난 20일 칸 영화제 레드카펫에 선 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몸선이 드러나는 블랙 앤드 화이트 드레스를 입었다. 우아하지만 영화제 심사위원장까지 맡았던 대배우의 드레스치곤 평범해 보였다. 그런데 그가 드레스 끝단을 살짝 들어 올린 순간, 사진기자들의 손에서 플래시가 수천 번 터져 나왔다. 검은색과 하얀색이 섞인 드레스에 초록색 안감, 그리고 레드카펫. 팔레스타인 국기 색이었다.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인 그는 가자지구 난민들이 처한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을 테다. 그의 드레스가 요원한 평화를 앞당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유명인이 목소리 없는 약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된 호소’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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