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대한민국 대통령은 어쩌다 ‘5년 단임’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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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궁금증을 지닌 국민이 있을 것입니다. “왜 우리나라 대통령은 5년 임기에 중임(重任)을 할 수 없는 단임인 걸까?”
그것은 1987년 직선제 개헌의 결과로 마련된 제6공화국 헌법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1공화국 헌법과 제3공화국 헌법은 미국처럼 대통령의 임기를 4년을 정하고 중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6공에선 5년 단임? 뭔가 애매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중임을 할 수 없게 한 것은, 전임 대통령인 이승만과 박정희의 경우에 재선 뒤 무리하게 3선 개헌을 한 뒤 장기 집권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예 ‘단임’을 못 박은 것이고, 제5공화국의 경우 7년 단임을 했는데도 국민들이 너무 길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보다 줄인 5년으로 한 것이라고요. 4년 단임을 한다면 또 너무 짧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좀 의아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장기 집권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면 아예 헌법에 ‘개헌을 하더라도 개헌 시점의 대통령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규정을 하고서 ‘4년에 한 차례만 중임 가능’으로 했더라면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이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준 연구서가 최근 출간됐습니다. 정치학계의 중진인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쓴 연구서 ‘제5공화국’(역사공간)입니다. 저는 책이 나오고 나서 곧바로 읽은 뒤 강원택 교수를 인터뷰해 신문에 기사로 실었습니다.(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4/05/29/FDJLMXY7YJBBHJQDL5YUAUYJ7U/) 5공은 ‘해리 포터’에 나오는 등장인물 볼드모트처럼 언급하지 말거나 기피해야 할 존재가 아니며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실체를 이룬 기간이었다는 것입니다.
1987년 민주화를 이룬 것은 6월항쟁뿐이 아니라 (1)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이 더 이상 물리적 강제력을 쓰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고 (2)1985년 총선으로 약진한 야당이 직선제 개헌이라는 ‘실현 가능한 목표’를 제시했으며 (3)결정적으로 5공이 이룩한 경제성장과 도시화·교육열에 힘입어 성장한 중산층이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구서에 6공 헌법이 ‘5년 단임’을 채택하게 되기까지를 파헤친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 책 8장 ‘87년 체제의 확립’의 내용을 바탕으로 좀 더 분석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5공 정부가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인 1987년 6·29 선언 직후 여야의 개헌 협상은 급속한 진전을 이루게 됩니다. 민정당의 권익현, 윤길중, 최영철, 이한동 의원, YS계의 박용만, 김동영 의원, DJ계의 이용희, 이중재 의원으로 이뤄진 ‘8인 정치회담’이 매우 효율적으로 진행돼 개헌을 논의했습니다. 8인 회담이 7월 31일부터 시작돼 헌법 전문과 본문 130개 조항에 완전한 합의를 이룬 것이 8월 31일었습니다. 이것이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된 것은 두 달도 지나지 않은 10월 27일이었죠. 대단히 신속하게 진행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헌법의 개요를 정한 8일 정치회담에서 이견이 있엇던 부분은 대통령의 임기와 부통령제의 도입 여부, 유권자의 선거 연령 등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민정당은 ‘대통령 6년 단임제’를 제시한 반면 야당은 ‘4년 1차 중임제’와 ‘부통령제’를 제시했다고 합니다. 야당이 제시한 안은 사실 제1공화국 헌법과 유사한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야당은 3공 헌법으로 돌아가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개헌을 하는 김에 아예 박정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는 것이었죠.
그런데 부통령제는 여당인 민정당 입장에서 대단히 우려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만약 YS와 DJ 중 한 사람이 대통령으로, 다른 사람이 부통령으로 나온다면?’ 표가 야당 쪽으로 쏠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YS와 DJ 누구도 자신이 부통령 후보가 되는 경우라는 것을 전혀 상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내가 왜 부통령이야? 대통령을 해야지!’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이 문제는 여당의 반대를 야당이 수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해결됐습니다.
즉, 6공에서 부통령은 없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제 대통령의 임기와 중임 여부가 문제였습니다. ‘김대중 자서전’(2010)에서 DJ는 “나는 원래 정·부통령제와 대통령의 4년 중임 방식을 주장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계로 인사로서 국회 개헌특위 10인 소위원회에 참석했던 김봉호는 2016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낸 ‘6·29 선언 관련 주요 인사 구술채록’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마지막에 5년으로 결정이 되었는데, 청와대에서 공식적으로 제안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비공식적으로 우리들한테 들어온 건 6년 단임제였어요. 그 얘기를 듣고 의논을 했죠. “6년 단임제 하자는 얘기가 나옵니다. 4년 중임제는 어떨까요?”했더니 DJ가 “6년은 너무 길어. 그리고 연임은 노이로제에 걸려버렸어. 두 번 하면 세 번 하고 싶고, 그러니 무조건 단임으로 끝내”라고 하셨어요. 사람 욕심은 무한정이다. 사람 욕심 때문에 한 번 더 한다 이런 얘기가 나오니까 단임으로 한 번으로 끝내라. 6년은 너무 기니까 5년으로 하라. 그 5년 단임에 대해서는 별로 이의 없이 받아주었어요.>(표기는 원문을 따름)
김대중의 말 중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두 번 하면 세 번 하고 싶으니 무조건 단임으로 끝내’라는 것입니다. 얼핏 보기엔 ‘내가 대통령을 하더라도 욕심이 생길 수가 있으니 단임으로 하자’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욕심’의 주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노태우나 YS를 말하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김영삼 역시 단임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1987년 8월 12일 MBC)를 보죠. “김영삼 민주당 총재는 오늘 민추협 사무실에서 새 헌법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 임기는 6년 단임이 너무 길다는 점을 들면서 5년 단임으로 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밝혔습니다.”
왜 YS와 DJ 모두 “6년은 너무 길다”고 했던 것일까요. 8인 정치회담에 참여했던 이중재 의원은 이 점에서 아주 중요한 말을 남겼습니다.
“상식적으로는 4년 연임제가 맞지만 양김씨는 8년 임기로 이어질지 모르는 제도에 의해 상대방이 당선되는 걸 꺼렸다.”
여기서 좀 따져볼 일이 있습니다. 제6공화국 첫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는 1988년 2월에 YS는 59세, DJ는 64세였습니다.(여기서 나이는 만 나이에, 한 해의 어느 시점에서도 생일이 이미 지난 것으로 간주하는 이른바 ‘신문 나이’입니다)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큰 인물은 노태우(1932년생)와 YS(1929년생), DJ(1924년생)였습니다. 물론 첫 대통령이 자신이 되면 좋겠지만, ‘4년 중임제’하에서 자신이 아닌 사람이 대통령이 돼서 중임을 한다면 8년, 다시 다른 사람이 중임을 한다면 16년이 흐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2004년에야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것인데 이때 YS는 75세, DJ는 80세가 돼서야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는 셈이었습니다.
과연 2004년 시점에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중 한 명이 대통령직을 시작할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16년 동안 이들이 계속 야당의 지도자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건데, 그 동안 다른 정치적 변수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 되는 것이죠.
하지만 5년 단임제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자신이 아닌 두 사람이 먼저 대통령이 된다고 하더라도 10년이 지난 1998년에 YS는 69세, DJ는 74세에 취임하게 되는 것이니 비교적 해 볼 만한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1988년에 56세인 노태우도 이 점은 마찬가지였습니다.
‘5년 단임제라면 이번 선거와 차기 선거에서 떨어지더라도 15년 안에는 대통령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점에 노태우와 김영삼과 김대중은 모두 생각이 같았던 것이죠.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는 실제로 그렇게 됐습니다.
13대 대통령 노태우: 1988~1993년(56~61세)
14대 대통령 김영삼: 1993~1998년(64~69세)
15대 대통령 김대중: 1998~2003년(74~79세)
그러니까 제6공화국 헌법은 이 세 사람이 모두 차례로 대통령에 취임해 임기를 마치는 시점(2003년)에 최고령자가 80세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5년 단임제’는 이 세 사람의 꽃놀이패였던 셈입니다. 이 구도에 균열을 내려고 했던 사람이 1992년의 이종찬과 1997년의 이회창이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이에 대해 “1987년 헌법은 3자 간의 정략적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비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만, 강원택 교수는 “타당한 지적이지만 ‘87년 체제’의 기초가 대통령 직선제였고 이를 만든 주역들이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라는 점에서 현실 정치적으로 다른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민정당에서 ‘단임’을 주장한 것에는 또 다른 한 사람의 의지가 강력하게 반영됐다고 합니다.
바로 대통령 전두환이었습니다.
8인 정치회담의 민정당 실무를 맡았던 현경대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구술채록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대통령 단임제에 대한 전두환 대통령의 의지는 아주 확고했습니다. “우리 정치 풍토에서 대통령이 표 얻을 생각해서 대통령 짓 하면은 아무것도 못 해. 나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생각이다. 역사의 심판을 받겠다고 생각하고 대통령을 해야 제대로 국가 미래를 위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뭐 대통령으로서 일을 할 수가 있지, 4년 후에 대통령 될 생각 해가지고 대통령 하면은 아무 일도 못한다.” 그래서 그냥 6년 단임… 이 부분에 관해서는 저희가 단임제는 어떻든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마지노선 같은 거였습니다. 그건 당시 전두환 대통령도 자기가 지금 7년 단임으로 끝내지 않냐, 그러니까 이 다음도 그래야 된다. …우리가 끝까지 6년 단임을 주장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결국 8일 정치회담에서 5년 단임으로 1년 줄여 가지고 그렇게 합의가 되어 나오더라고요.>(표기는 원문을 따름)
전두환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상당수의 국민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지금, 의외로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전두환은 우리 헌정 사상 최초로 ‘정해진 임기를 연장하지 않은 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대통령’이라는 것은 맞는 팩트라는 점입니다. 물론 일해재단 등을 통해서 권력 연장을 기도했다는 의혹이 일어났고, 1983년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했던 것이 대통령 퇴임 후에도 사실상의 1인자로서 국정에 실권을 미치고 있었던 네윈 버마사회주의계획당 당수로부터 ‘한 수 가르침’을 얻고자 함이었을 거라는 해석이 큰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대통령 임기 연장과는 다른 문제였습니다. 전두환은 퇴임 전후 그것에 대해 나름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의 후임자가 단임으로 임기를 마치지 않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도 단임을 했는데 너희들이 감히...’라는 심리가 되겠죠. 그런데 전두환의 이 ‘단임 고집’에 대해 YS와 DJ는 상당히 결이 다른 이유로 흔쾌히 받아들인 결과 합의가 이뤄진 것입니다. 이로써 1971년 대선 이후 현직 대통령이 ‘나를 다시 뽑아달라’며 선거전에서 호소하는 광경은 다시 볼 수 없게 됐습니다.
결국 ‘대통령 5년 단임제’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네 사람이 1987년 시점에서 타협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정치인이 한 명 있었습니다.
김종필이었습니다.
결국 JP가 홀로 내각제를 주장했고 1990년 3당합당과 1997년 DJP 연합 등에 계속 참여한 것은, 87년 체제에서는 끝내 자신이 1인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정치적 구도를 읽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어쨌든 그는 대통령을 한 번 하는 대신 총리를 두 번 했습니다. 두 번째는 그래도 실세 총리에 가까웠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6공화국 헌법의 핵심이 된 ‘대통령 5년 단임제’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네 사람이 모두 고인이 됐는데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5년 단임제는 분명 대통령이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소신 있게 나라를 운영할 수 있는 길을 터 줬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5년 내내 국민과 여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이웨이 식으로 자기 고집만 앞세우는 불통(不通)의 통치 역시 가능하게끔 활짝 문을 열어줬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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