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철의 글로벌 인사이트] 용의주도 ‘사법 개혁’ 對 한밤 홍두깨 ‘의료 개혁’
대통령에게는 핵심 책무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행정’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이다. 의사에 비유하자면, 전자는 ‘치료’이고 후자는 ‘수술’인 것이다. 당연히 수술은 치료보다 훨씬 어렵고 리스크도 크다.
지난 몇 달간 진행된 소위 ‘의료 개혁’이라 불리우는 것은 대표적인 ‘수술’에 해당된다. 개혁이란 어려운 것이다. 본질적으로 기득권자들의 ‘밥그릇’을 건드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발과 저항은 거의 필연적이다. 그런 반발을 제어하고 개혁을 제대로 이루어 내려면 반드시 용의주도한 전략이 있어야 한다. 어떤 전략인가? 무엇보다 그 개혁이 ‘정권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개혁이라는 강력한 인상을 당사자들에게 줘야 한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
좋은 예가 있다. 바로 김영삼 정권 때 있었던 소위 ‘사법 개혁’이다. 그 개혁은 지금의 의료 개혁과 본질이 같았다. 즉 변호사 수를 획기적으로 늘리자는 것이었다. 그 개혁의 핵심 추진자는 당시 청와대 박세일 정책수석이었다. 서울 법대 교수 시절부터 열렬한 개혁 논자였던 그는 취임하자마자 개혁의 칼을 뽑았다. 그가 첫 번째로 시도한 게 ‘사법 개혁’이었다. 신임 변호사 수를 당시의 연간 50~100명 수준에서 장기적으로 15~20배까지 늘리자는 내용이었다.
그 개혁이 발표되자 법조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국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막강한 법조계, 판검사와 변호사로 구성된 그 집단은 박 수석의 시도를 법조 전체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놀라움과 분노로 충만된 법조계의 거대한 반발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대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혁은 불과 두어 달 후, 양쪽의 합의로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그 개혁 덕분에 오늘날 구두닦이 소년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자기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졌다.
실질적으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직업군에 대한 개혁이 어떻게 그렇게 부드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개혁의 실질적 추진 주체가 ‘정부’가 아니라 바로 ‘국민’임을 법조계로 하여금 깨닫게 한 것이다. 어떻게? 박 수석은 취임하자마자 먼저 개혁 추진의 주체가 될 민간 기구를 하나 만들었다. ’세계화 추진 위원회’라는 것이었다.
박 수석은 소위 ‘사법 개혁 백서’라는 것을 만들었다. ‘세계화 추진 위원회‘ 이름으로 발간된 그 백서는 사법 개혁의 절실한 필요성을 논리와 데이터로 쉽게 설명하는 두껍지 않은 책자였다. 백서는 위원회 이름으로 사실상 전국에 있는 거의 모든 언론사에 뿌려졌다. 그것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언론이 그 자료를 바탕으로 소위 ‘사법 개혁’ 시리즈를 싣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개혁을 향한 거대한 공감대로 연결되었다. 국민의 이런 거대한 공감대, 그리고 외침을 아무리 막강한 힘을 가진 법조계라도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개혁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연간 50~100명에 불과했던 신임 변호사 수는 2001년 1000명을 넘게 되었고 지금은 1500명을 넘나드는 수준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개혁이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즉, 주도는 정권이 하되 그 뒤에 막강한 ‘국민의 힘’이 버티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줘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때 이번 의료 개혁은 지극히 ‘아마추어’적이다. 무엇보다 그 중차대한 개혁을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갑자기 발표해 버린 것이다. 제일 기가 막히는 것은 시기였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던져진 개혁, 그것은 그 개혁에 ‘악취’가 진동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그런 개혁에 개혁 대상이 어떻게 순순히 응할 수 있겠나?
한마디로 30년 전 사법 개혁과 너무 대조적이다. 사법 개혁처럼 ‘개혁 백서’까지는 만들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공청회 같은 것이라도 해야 했다. 시민과 언론들을 초청해 ‘의사 부족’이 야기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들을 체계적으로 지적하는 공청회 말이다. 물론 의료계 대표에게 반박하는 기회도 줘야 한다. 언론들은 당연히 보도했을 것이고, 그것은 사회적 토론으로 연결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개혁을 위한 토양을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 정도 작업은 기본 상식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선거 직전 어느 날 불쑥, ‘정치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개혁을 발표해 버린 것은 아마추어적 통치의 ‘끝판왕’급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의료계의 격렬한 반발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개혁은 본질적으로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법률 서비스와 마찬가지로 국민의 행복과 너무나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나라에서 의사 부족 때문에 국민들이 겪고 있는 각종 애환은 심각한 상황이다. 종합병원에 가면 2~3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그 애환을 토로하며 울분을 터뜨리는 수많은 시민의 고통을 의사들이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부의 황당한 개혁 접근법에 대한 의료계의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내가 이 개혁의 불가피성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사법 개혁’을 통해 온 국민이 누리게 된 그 행복감을 이제 의료계가 줄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정권의 아마추어적 접근법에 대해서는 의료계가 그동안 웬만큼 교훈을 주었다고 본다. 국민 삶의 기본 터전을 지키는 신성한 사명을 수행하는 최상위 엘리트 직군이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에 너무 열심이라는 인상은 솔직히 의사분들의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국민을 위해 정말 필요하면 희생도 할 수 있는 넓이와 깊이가 그 직역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약 2500년 전 의사가 가져야 할 기본 정신을 설파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번 읽어 보았다. 나에게 특히 인상 깊은 구절은 이것이었다. “내가 어떤 집을 방문하건 나는 환자의 이익을 위해 그곳에 갈 것이며 모든 의도적인 잘못과 해악을 삼갈 것이다.” 이제 이 나라 의료계의 대국적 시각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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