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가 만난 사람]“세상이 정한 경로에서 튕겨 나와도, 삶은 또 이어집니다”
황보름 작가(44)의 20대도 그랬다. 하지만 그는 흔한 비극을 흔치 않은 희망으로 바꿨다. 나이 서른에 7년 다닌 대기업을 그만두고 10년을 갈고닦은 끝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낸 것. 그가 2022년 출간한 소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클레이하우스)는 국내에서만 30만 부가 팔렸고, 지난달엔 서점 직원들이 투표로 뽑는 일본 서점대상 1위(번역 부문)를 했다. 지구 반대편 브라질의 독자가 ‘깊은 우울감에 빠졌는데 큰 위로를 받았다’, ‘책에 나온 문장을 삶의 지침으로 삼겠다’며 열렬한 독후감을 보내온다.
옛 동료들은 경력을 쌓아 가는데, 독자를 만나리라는 기약도 없이 방에 틀어박혀 글만 썼던 황 작가의 30대는 어떤 시간이었을까.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 같았을까 싶어 29일 만났는데, 그는 “대체로 많은 날이 편안하고 좋았다”고 했다.
‘취업이 잘된다’는 전망에 사촌 오빠들을 따라 진학한 공대, ‘3점대 후반’ 학점으로 졸업(2004년), 취업 재수도 없이 입사한 대기업 LG전자. 황 작가의 사회생활 출발은 순탄한 편이었다.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그가 일하게 된 곳은 개발 부서였다. 하지만 얼마 안 돼 깨달았다. 자신은 코딩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개발자는 자는 거 아냐’라는 슬픈 농담이 있을 정도의 장시간 노동도 괴로웠다. 휴대전화 새 모델을 만드는 3∼6개월짜리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주 7일 근무에 오후 10, 11시 퇴근이 당연시됐다.
“그렇게 몇 개월을 지내면 사람이 피폐해지잖아요. 더구나 일이 없어도 야근을 해야 했어요. ‘프로젝트가 시작됐는데,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느낌? 직원들이 늦게까지 남아 있는 모습을 위에 보여주려던 것도 있던 것 같고….”
동료들에게 민폐는 끼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일에서 보람을 찾긴 어려웠다. 3년 차에 번아웃이 왔다. “너무 힘들었는데, 그 시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끔찍한 시절이라 그런가 봐요.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다가 체중이 갑자기 15kg 늘기도 했어요. 어느 정도 지나니 완전히 무감해지더라고요. 집과 회사만 왕복하고, 사람들도 만나지 않고, 그냥 기계처럼 살았어요.”
회사를 그만둔 건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코너에 몰려서, 무기력해서였다고 한다. 다행히 그동안 돈 쓸 시간도 없었고, 소비에 관심이 없었던 덕에 통장에는 7년간 받은 월급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인생에 한 번 정도는 좋아하는 일을 해봐도 되지 않을까? 마흔 살 전에는 그런 일을 찾자.’ 부모님 집에 함께 살면서 야금야금 조금씩 쓰면 10년은 어떻게 될 것도 같았다.
처음부터 글을 쓰려고 했던 건 아니다. 서울 강남의 어학원에 다니다가 2012년쯤부턴 1년쯤 강사 일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러다 하고 싶은 일이 글쓰기라는 걸 깨달았다. 어릴 적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던 그였다. 책 2권에 해당하는 원고를 여러 출판사에 보냈지만 출간 거절 메일만 돌아왔다. 가까스로 2017년 첫 에세이 ‘매일 읽겠습니다’(어떤책)를 냈지만 1쇄도 다 안 나갔다. 이후 ‘난생처음 킥복싱’(티라미수 더북), ‘이 정도 거리가 딱 좋다’(뜻밖) 등 에세이 2권을 더 냈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꾸준히 노력했다. 방에서 글을 쓰는 단순한 삶이었다. 믿을 구석도 없는데 느긋했다고 한다. “먼 미래를 바라보지 않았어요. 5월엔 ‘12월까지는 버틸 수 있잖아’ 생각했죠. 뚜렷한 계획도 희망도 없었지만 그냥 그 생활이 좋았어요.” 부모님은 황 작가를 마냥 지지해줬다. “서른 넘어서 작가 되겠다고 몇 년이나 방에 틀어박혀 있으니 ‘엄마 아빠 몸에서 사리가 나올 수도 있겠다’ 싶었죠. 그런데 제가 회사 다니며 불행해하는 걸 느끼셨대요.”
그런 그도 마흔한 살이 되자 ‘겉은 작가였지만 속은 백수였던’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로 먹고사는 일의 요원함’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2021년 초 선배의 소개로 다시 회사에 취업했다.
하지만 삶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선물을 준다. 2018년 ‘시간은 남는데 에세이는 어렵고, 몇 달만이라도 소설로 도망가자’는 마음에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연재했던 것이 ‘휴남동 서점’이었다. 이미 전업 작가 생활엔 ‘마침표를 찍었다’고 생각한 뒤 이 소설을 별 기대 없이 전자책 출판 공모전에 출품했다. 당선된 소설은 ‘밀리의 서재’에서 e북으로 출판됐고, 비로소 세상으로 나아가게 됐다.
소설엔 번아웃에 회사를 그만두고 남편과도 갈라선 뒤 서점을 차린 영주, 취업에 실패하고 서점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는 민준, 무기력증에 빠진 고교생 민철,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부당한 대우를 겪고 그만둔 뒤 뜨개질을 하는 정서 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인물 사이엔 갈등이나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다. 기자가 “신춘문예라면 예심서 낙방했을 것 같다”고 하자 황 작가는 “등장인물끼리 지지고 볶는 얘기가 아니라, 애초에 관계를 통해서 치유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래도 ‘다음이 너무 궁금하다’는 분들이 너무 많다”라며 웃었다.
소설은 꽤 직설적으로 우리 사회의 노동 문제를 거론한다. 황 작가는 말했다. “일을 너무 많이 해 노동에 삶이 잠식되잖아요. 대기업 중소기업 격차도 크고, 삶을 영위하고 미래를 준비할 만큼 돈을 버는 이들도 적고요. 문제가 너무 오래 지속되면 마치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돼요. ‘요즘 취업 안 된대, 비정규직 많지’라고 하면 식상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구체적 개인을 들여다보면 그런 게 하나하나 얼마나 큰 상처이겠어요. 나는 열심히 살아왔는데 사회가 받아들여 주지 않을 때, 앞에서 문이 닫혔을 때의 심정을 헤아리고 싶었습니다.”
직장에서 번아웃을 겪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저는 힘든 시간을 지혜롭게 지나오지 못해서, 그냥 정통으로 맞아서 이런 소설을 쓴 것 같다”며 “가능하다면 그 시간을 덜 힘들게 지나길 바란다.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 말고 주말엔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고, 운동을 하며 다른 정체성을 만들면 무게가 덜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최근 서점가엔 ‘휴남동 서점’과 언뜻 닮아 보이는 소설이 꽤 이어지고 있다. 친숙하고 추억이 있을 만한 공간을 배경으로 각자의 사연을 가진 여러 인물이 아픔을 치유하는 이야기들이다. ‘힐링 소설’, ‘장소 소설’로 불리기도 한다. “기존엔 문학적 성취를 이룬 분들이 등단을 거쳐 주로 출간을 했잖아요. 그러다 이런 책의 성공을 보고 평소에 내면에 이야기를 간직하던 분들이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고 여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주제가 비슷한 건) 모두가 뭔가 힘들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요.”
25개국에 판권이 수출된 ‘휴남동 서점’은 한국 문학 수출에서도 ‘현상’이라고 할 만한 것을 이끌고 있다. 출판사에 따르면 이 소설은 최근까지 일본과 브라질, 영국 등에서만 각각 3만5000부가량이 팔렸다. ‘아몬드’(손원평), ‘불편한 편의점’(김호연) 등과 함께 K문학이 현지에서 단단한 팬층을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소설들이 상업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자 최근 수출되는 일부 한국 작품은 출간 경쟁이 붙어 선인세가 2억∼4억 원 수준까지 올랐다고 한다. 황 작가는 “브라질 신문과도 서면 인터뷰를 서너 번 했다”며 “‘휴남동 서점’ 속 등장인물처럼 느슨하게 거리를 두고 만났으면 좋겠다는 열망, 잔잔하고 평화로운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바람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소설을 또 쓸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저 이야기를 한다’는 자세로 올해엔 새로운 소설 초고를 완성할 계획이라고 했다. “저는 유독 사람이 만나서 변화하는 이야기가 좋아요. ‘시절인연(時節因緣·인과에 따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환경이 조성돼야 일이 일어난다는 불교용어)’이랄까…. 이번에도 그런 얘기를 쓰게 될 것 같습니다.”
“삶엔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모두가 같은 삶과 꿈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각자 자기에게 맞고 편한 삶이 있는 거겠지요. 대체로 고되고 힘에 부치지만 대개 다 지나가잖아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마치 경로를 이탈한 것처럼 보이는 모든 분들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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