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의 어느 봄밤 [삶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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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를 발견한 아이가 조르르 달려와 아빠를 부른다.
성벽 아래로 비스듬한 잔디 언덕에 일찌감치 자리 잡은 가족들은 돗자리에 소소한 간식거리를 늘어놓았다.
조선 시대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계획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이 화성(華城). 큰 돌을 쌓아 올리고는 바로 뒤에 언덕을 덧대어 성벽을 보강하는 것이 우리 전통의 축성 방식인지라, 성벽 안쪽 길을 따라 걸으면 한편에는 돌벽이 손에 만져질 만큼 가까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언덕 지형이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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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이쪽이야 이쪽!"
빈자리를 발견한 아이가 조르르 달려와 아빠를 부른다. 성벽 아래로 비스듬한 잔디 언덕에 일찌감치 자리 잡은 가족들은 돗자리에 소소한 간식거리를 늘어놓았다. 무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늘 그렇듯 휴대폰 삼매경에 빠진 아이를 사이에 두고, 오랜만에 외출 나온 부부는 맥주 한 캔을 서로 주고받으며 기분을 낸다. 수원화성 성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음악 공연 '수원화성 헤리티지 콘서트'를 기다리는 풍경이었다.
사실 큰 기대 없이 우연히 들른 공연이었다. 음질이 떨어지기 마련인 야외 무대인 데다 특별한 충성심 없이 아무나 올 수 있는 무료 공연이라니, 그저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나 때워볼까 심드렁하게 앉았다. 그래도 삑삑거리는 음향 점검 소리에 조금씩 설레는 기분. 수십 대의 현악기를 가슴에 품은 시립교향악단과 근사하게 차려입은 합창단이 차곡차곡 무대를 채우더니 꽤나 섭외에 신경 쓴 가수들도 등장했다. 무엇보다 마음을 꽉 채운 건 그 무대를 둘러싼 수원화성이었다.
조선 시대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계획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이 화성(華城). 큰 돌을 쌓아 올리고는 바로 뒤에 언덕을 덧대어 성벽을 보강하는 것이 우리 전통의 축성 방식인지라, 성벽 안쪽 길을 따라 걸으면 한편에는 돌벽이 손에 만져질 만큼 가까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언덕 지형이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진다. 다부진 옹성과 망루도 구경하고 언덕 아래 포근하게 자리 잡은 마을도 내려다보며 정조가 꿈꾸었던 조선 최초의 신도시 풍경을 상상해 보는 길. 3시간 동안 쉼 없이 걸으며 구불구불 이어지는 성벽 길은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유산이라, 일부러 찾는 외국인 관광객도 꽤 많다.
정조의 군사들이 활을 쏘고 무예를 단련했다는 연무대(鍊武臺) 터에 세운 무대 주위는 말굽 모양으로 성벽이 에워쌌다. 무대의 첫 번째 배경은 현대의 기술이 총동원된 영상 패널이었지만, 그 뒤로 펼쳐지는 진짜 주인공 배경은 조선시대 성곽이 만들어내는 우아한 곡선이었다. 해가 떨어지고 조금 쌀쌀한가 싶을 때면 성벽을 은은하게 밝히는 등불이 괜스레 따뜻하게 느껴졌고, 공연 사이사이 잠시 뒤를 돌아보면 화성의 군사를 지휘하던 동장대(東將臺) 옛 건물도 같이 공연을 구경 중인가 싶었다. 보송보송하고 따스한 바람을 타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듯한 묘하고 특별한 봄밤, 오래된 유산 위에서 즐거운 오늘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팬클럽까지 거느린 가수가 퇴장하고 클래식 공연으로 바뀌면서 이제 좀 썰렁해지려나 하던 걱정은 뒷자리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낮은 콧노래 덕에 곧 잊혔다. 흥분이 가라앉은 무대에서 오보에로 연주하는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 멜로디를 백발의 노부부가 나지막하게 따라 읊조리고 있었다. 굵직한 지팡이에 올린 손을 박자 따라 가볍게 까닥거리는 할아버지를 향해 살포시 고개를 기울이는 할머니. 이어지는 곡마다 "잘한다, 참 잘한다" 칭찬하며 박수도 열심히 쳐 주시니 그리도 유난히 맑은 얼굴을 가지셨구나 싶었다. '접근 금지, 촉수 엄금'이 아니라 자유롭게 드나드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닿아 있어 생명력을 가지는 성곽. 살아 있는 오래된 것들은 이리도 아름다웠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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