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함안 말이산 고분군에서 하룻밤
속도란 이럴 때 쓰라고 공중이 내주는 것, 내 고향과도 연결된 경남의 산수를 휘감아 등에 업고 함안읍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이제 육안으로도 포착이 가능하니 어디에서 불쑥 나타날까 은근 기대하면서 전방을 주시했다. 이윽고 시내로 들어와 두리번거리는데 복잡한 전선, 가로등과 표지판 사이에서, 아연, 아라가야의 푸르스름한 무덤들이 공중에 떠올랐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말이산 고분군.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이 신비와 경이 앞에서.
숙소를 정하고 해가 넘어가기 전에 얼른 서둘렀다. 아파트와 무덤이 이리도 서로 잘 어울릴 줄이야. 세상 어디든 바깥과의 접면은 있는 법이다. 늦은 오후와 저녁이 교차하는 해 질 녘, 여름 낮은 길어서 사물의 분간은 아직 뚜렷하고, 햇살도 옆으로 낮게 비춰 키 작은 풀들의 그림자도 길게 만든다. “현실이란 외투의 구멍”(<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을 통해 옛 가야의 정취를 탐험하기에 너무 좋은 시간.
제4호 무덤 앞에서 꽃동무들이 기어이 귀한 야생화 한 촉을 발견하였다. 애기장구채. 등 뒤로 긴 그림자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오는 길. 지금이 사라지는 낮과 짙어지는 밤의 경계라면, 이곳은 죽은 이들의 무덤과 산 자들의 집이 서로 어울린 동네. 낮은 경사의 좁은 골목을 지날 때, 일본인 남편과 한국인 아내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아름다운 문패가 발길을 붙든다. 자갈이 그대로 드러난 흙담 위에 이불 서너 채만큼의 파도를 떼 매고 온 듯 물결치는 슬레이트 지붕. 두 분은 이 집에서 무슨 사연을 엮고 있는가.
밤하늘의 달을 확인하며 말이산을 빠져나올 때 골목 끝에 매달린 집의 반쯤 열린 창문으로 형광등 불빛. 그 사이로 기름에 생선 굽는 소리, 수돗물 철철 흐르는 소리. 달그락달그락 사기그릇에 밥 푸는 소리. 달력도 언뜻 보이고 어느 모녀가 도란도란 저녁상 차리는 소리. 이제 곧 숟가락과 젓가락 집는 소리. 더 머무르면 그 소리들이 우리 시대의 현대어로 들릴 것 같아서 도둑처럼 얼른 자리를 피했다. 오오오, 짐작으로 감지하고 기미로 느끼는 지금 저기 저 너머의 생활(生活)이 아라가야의 그것과 얼마나 다르며 무슨 차이가 있으리오. 소국과민(小國寡民)의 나라인 듯 멀리서 개 짖는 소리도 들렸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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