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 (125) 남산 분수대
‘남산’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남산타워나 케이블카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어린 시절 사랑의 맹세를 하며 채운 ‘자물쇠’가 생각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지긋한 나이의 분들은 교복을 입고 새벽부터 줄을 섰던 남산도서관을 꼽을 수도 있다. 한때 “남산에서 나왔습니다” 하면 고문과 죽음이 연상되던 어두운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어린이들에게 남산은 ‘어린이회관’과 시원한 분수대가 있는 신나는 곳이었다.
조선이 개국하며 남산(南山)으로 불리게 된 이 명산에 공원을 조성한 것은 일제다. 1925년에는 일본 왕실의 ‘황조신’인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을 모시는 거대한 규모의 조선신궁을 세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1945년 해방 직후 일제는 신사를 해체하고 주요 시설을 소각했다. 해방 정국에는 대규모 정치 집회가 열렸다. 이승만 대통령 80세 생일 기념으로 24m의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다가 4·19혁명 때 끌어내려지기도 했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남산에 분수대와 식물원이 생긴 것은 1968년 남산공원이 개장하면서부터다. 1971년 사진을 보면 시원한 물줄기의 분수대 뒤에 식물원이 보이는데, 분수대는 조선신궁 3개소의 단(壇)이, 식물원은 ‘본전(本殿)’이 있던 자리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분수대였으며, 사진에서 보듯이 나들이 장소로 큰 사랑을 받았다. 그때 찍은 빛바랜 사진을 가진 분들도 있을 것이다.
2024년 사진을 보면 식물원은 사라졌고 분수대의 물줄기도 보이지 않는다. 1991년부터 ‘남산 제 모습 찾기(가꾸기)’ 사업을 하면서 남산공원이 변모하기 시작했고, 이곳이 한양도성이 있던 자리라는 점이 확인되면서 성곽 복원 사업을 위해 2006년 식물원은 철거되었다. 2024년 사진 오른쪽에 흰색으로 보이는 지붕이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이다. 성곽을 구성했던 성돌이 태조, 세종, 숙종 때 달라진 모습, 축성에 사용된 구조물의 흔적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분수는 사라졌지만 분수대는 남았다는 것이다. 분수대 안은 모래로 채워져 있고, 정중앙에 주 분수 노즐이 보인다. 분수대 앞 입간판에는 “분수대는 추억의 명소로 의미가 크기 때문에 철거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추억이 분수대에만 있겠냐마는, ‘복원’이란 명분으로 지우기와 감추기를 능사로 해 온 역사를 볼 때 신선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 이 칼럼에 게재된 사진은 셀수스 협동조합 사이트(celsus.org)에서 다운로드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김찬휘 녹색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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