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탈자본주의 대안은 어디에? [강수돌 칼럼]
강수돌 |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5월16일과 17일, 진주 경상국립대에서 국제학술행사가 열렸다. 정확한 제목은 ‘동아시아에서의 포스트자본주의적 대안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다. 2001년부터 총 20차례 국제회의와 연구팀을 이끈 정성진 교수는 인사말에서 “일본, 한국, 중국 등 아시아 나라들이 20세기 경제 개발의 ‘선도 모델’이기도 했지만, 21세기 글로벌 자본주의의 복합 위기에선 오히려 ‘약한 고리’ 내지 ‘진원지’가 됐기에, 향후 마르크스주의 관점이나 학제적 방법론을 통해 21세기 동아시아를 위한 포스트자본주의적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행사엔 한·중·일은 물론, 인도, 독일, 노르웨이 등 6개국 학자 35명이 발표와 토론에 적극 참여했다. 모든 내용을 다 소개할 순 없어, 사회적 토론이 꼭 필요한 몇가지만 본다.
첫째, 행사 제목이기도 한 ‘포스트자본주의적 대안’에 대해서다. 흔히 학술 용어에서 ‘포스트’는 ‘후기’라는 뜻이 있다. 일례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결합을 통해 자본 축적을 해온 ‘포디즘’에 대비, 다품종 소량생산과 소비의 다양화를 유연하게 결합한 축적 양식을 ‘포스트포디즘’이라 한다. 그런데 ‘포스트자본주의적 대안’에서 포스트는 단지 ‘후기’가 아닌, ‘탈피’ 내지 ‘지양’의 의미를 띤다. 차라리 ‘탈자본주의 대안’이 나았을 뻔했다. 왜냐면, 현재 우리가 직면한 복합 위기(경제, 정치, 금융, 사회, 심리, 교육, 문화, 기후, 생태, 평화 등)의 근저엔 자본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돈(자본) 놓고 돈(이윤) 먹는’ 시스템이다. 더 큰 가치를 얻고자 경쟁한다. 그래서 자연을 자원화, 인간(노동력)을 상품화한다. 인간 노동은 한편으로 원료나 기계 속 가치를 상품에 이전하며, 다른 편으로 자기 노동력 이상의 가치를 상품에 구현한다. 가치와 비가치는 ‘함께’ 자본주의를 구성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잉여가치를 만드는 노동인데, 최근 한국 정부가 주당 노동시간을 40시간에서 52시간이나 최대 68시간으로 늘리려 한 건 ‘절대적 잉여가치’ 때문! 동일한 시간이라도 돌봄 노동에 이주 여성을 투입하거나 사회 전반의 생산성 향상으로 노동력 가치가 내려가면 ‘상대적 잉여가치’가 커진다. 게다가 특정 기업이 기술·조직 혁신으로 월등한 생산성을 내면 ‘특별 잉여가치’까지 챙긴다. 여기서 밀리는 기업은 망하고 노동자도 실업한다. 살벌한 생존경쟁! 최근 코로나 사태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물가 폭등까지 불렀다. 이렇게 모든 기업이 이윤 경쟁을 하는 가운데, 일부 자본가나 투자자만 돈 잔치를 벌인다. 대다수 노동자는 노동과 소비, 부채의 덫에 갇혀 병들고 지치며, 그사이 지구 오염과 온실가스, 기후위기가 심화돼 인류를 벼랑으로 내몬다. 한국은 물론, 세계의 현실이다. 이제 ‘탈자본’이 시대정신(Zeitgeist)이다.
둘째, 일본 자본주의와 관련해 2012년 이후 아베노믹스(금융 완화, 재정 지출, 성장 촉진)나 2021년 이래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신-자본주의’ 정책(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강조)이 과연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30년’ 회복을 넘어 ‘탈자본’의 가능성을 지닐까 하는 의문이 있다. 솔직히,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는 198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의 종말일 뿐 아니라 사실상 세계 자본주의의 파산선고였다. 만일 미국 정부가 1조달러 이상, 유럽연합이 2천억유로 이상의 구제금융을 긴급 투입하지 않았다면 세계경제는 도미노처럼 붕괴했을 터!
현 세계경제는 마치 병원에서 중환자가 산소 호흡기를 끼고 억지로 수명 연장을 하는 것처럼 인위적 경기부양책이나 부채 경제 촉진(“빚내서 집 사라”)을 통해 연명 중이다. 이 상황에서는 그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묘수가 없다. 자연은 고갈되고 인구는 저출산, 고령화로 치닫는다. 이젠 ‘발상의 전환’이 답이다. ‘많이 먹고 많이 싸는’ 기존의 성장주의를 버리고 ‘조금 먹고 조금 싸는’ 대안 구조가 돌파구다. 이 맥락에서 릿쿄대 사사키 류지 교수가 강조한 ‘공유지 탈환’이나 오사카대 스미다 소이치로 교수가 제창한 ‘인종차별을 넘은 초국적 아시아 연대’가 눈길을 끈다. 이렇게 공유와 연대가 탈자본에 중요하나, 막상 그 주체들의 의지가 문제다.
셋째, 동아시아 중 최다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은 어떤가? 우선, 중국의 경제 시스템에 대해 ‘사회주의 시장경제’ vs ‘국가 자본주의’란 질문은 유효하다. 전 난징대 총장 장이빈 교수는 ‘국가 자본주의’라는 일부 학자의 비판적 규정에 난색을 표하며 ‘중국식 사회주의’란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메가(MEGA) Ⅱ’ 연구는 물론, 청년-후기 마르크스 비교, 최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 탐구를 지속한다. 또 ‘마르크스로 돌아가자’란 책에서 중국식 사회주의의 혁신을 촉구한다. 시진핑 주석도 2017년 19차 당대회에서 “생태문명 체제”를 통한 “아름다운 중국” 건설을 강조했다. 중국이 앙리 르페브르의 공간 이론이나 일상성 비판, 나아가 비물질 노동이나 플랫폼 노동에도 관심을 갖는 배경이다. 한편 “중국식 플랫폼 사회주의”, “플랫폼 협동조합”의 가능성이나 “도가주의 에코페미니즘” 역시 일부 한계에도 불구, 새 대안 모색에 중요한 실마리를 준다.
그러나 중국이 아무리 “사회주의”와 “생태문명”을 강조해도 ‘폭스콘’ 내지 ‘알리·테무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구조적 모순은 여전하다. 국가적 통제로 자율적·민주적 노조는 부재하고, 노동 과정은 저임금, 장시간, 무권리 등이 특징이다. 농촌에서 몰려든 농민공의 생활환경은 열악하고, 빈부 격차는 한국이나 미국을 뺨친다. 아무리 미국 패권주의의 압력과 위협이 강해도 이런 문제를 정당화하긴 어렵다.
하루도 버티기 힘든 현실인데, ‘탈자본’의 대안이라니, 시대착오적인 탁상공론? 그러나 오늘날 복합위기를 부른 뿌리가 자본주의라면? 자본이란 결국 왜곡된 사회관계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제대로 통찰하는 주체의 변화가 필수다. 19세기를 치열하게 산 마르크스를 21세기에도 읽는 이유다. “반들반들한 이마는 둔감함을 의미”하고 “웃는 사람은 아직 끔찍한 소식을 접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가 가슴을 저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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