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환, ‘무노조 삼성’ 맞서 투쟁 멈추지 않은 진짜 노동자

한겨레 2024. 5. 3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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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을 기리며
지난 19일 별세한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아직도 곁에 서 있는 듯한데 지난 5월19일 김성환 선배가 저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1500만원짜리 묫자리 하나 쓸 돈도 없어 민족민주열사·동지 묘역인 마석 모란공원에도 모시지 못하고 가족장 후 수목장을 해야 했습니다. 쓸쓸한 시대에 서글픈 일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2019년 5월1일, 한국영화계의 또 하나의 전설인 ‘파업전야’가 제작 30년 만에 한국영상자료원의 복원을 거쳐 처음으로 극장에서 개봉되었습니다. 제작 당시 ‘파업전야’ 촬영이 가능했던 곳은 인천지역 핵심 민주노조 사업장이던 한독금속이었는데, 그 노조 사무국장이 김성환 선배였죠. 1987년 6월 항쟁과 뒤이은 7·8·9월 노동자대투쟁을 열어가던 인천지역 핵심 활동가로 실제 현장에서 피를 튀기는 ‘파업전야'를 이끌었던 선배의 삶도 기록되면 좋을 텐데요.

선배가 널리 알려지기로는 ‘삼성공화국’이라는 거대한 골리앗에 맞서 싸운 다윗이었습니다. 삼성 계열사였던 이천전기로 옮겨 가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 싸우다 해고된 후 2000년 삼성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와 2003년 삼성일반노조 등을 만들면서 30여 년 동안 ‘무노조 삼성’에 맞선 힘겨운 투쟁을 멈추지 않았죠. 잠시 멈춘 건 2005년 2월부터 2007년 12월31일까지 옥중 생활할 때뿐입니다. 갇힌 까닭은 2002년 ‘삼성재벌 노동자탄압백서’를 펴내며 본인과 울산 삼성에스디아이(SDI) 노동자와 해고자들의 휴대전화가 적어도 1998년부터 삼성에 의해 불법 복제되어 도청과 위치추적 등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는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 죄목이었죠. ‘허위’라니요. 2007년 삼성에서 일했던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과 삼성에스디아이 노무담당자의 양심선언 등에 의해 모두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삼성노동자 위치추적, 삼성이 직접 했다”, “김성환 위원장 구속 삼성의 작품”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언론을 통해 쏟아졌죠.

87년 대투쟁 때 인천에서 노동운동
삼성계열사에서 민주노조 만들다
쫓겨나고 20여 년 ‘골리앗과의 싸움’
삼성 불법도청 폭로 뒤 되레 3년 옥고
‘감시·미행 등 트라우마’ 오랜 고통

저 하늘에선 부디 평화로우시길

그러나 김성환 선배가 생전에 수차례에 걸쳐 요구한 재조사와 재심 등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선배는 당시 3년 징역 생활 동안 그 부당함에 맞서 아홉 번의 옥중 단식을 하기도 했죠. 정경유착에 의한 사법탄압으로 선배가 갇혀 살아야 했던 3년은 이제 어떻게 보상받고 명예회복 될 수 있는지요?

선배는 자신의 복직이나 명예회복만을 위해 싸우지 않았습니다. ‘벌금 300만원 대법원 확정판결', ‘벌금 500만원 대법원 확정판결’, ‘벌금 70만원 2심 판결', ‘벌금 70만원 1심 판결'….

2014년 9∼12월 받은 판결 내용이라고 소개된 당시 기사 내용입니다. 2005년엔 18년 간 제일모직 여수 사업장에서 일하다 뇌출혈로 쓰러진 김도경씨의 산재 인정을 위해 싸웠고, 2007년엔 삼성의 태안 기름유출 사고 진상규명 투쟁, 2011년엔 삼성전자 엘시디(LCD) 사업부 천안공장에서 일하던 김주현씨 투신자살 진상규명 투쟁에 함께했습니다. 삼성 백혈병 피해자 명예회복과 진상규명 투쟁에 함께했습니다. 삼성에버랜드노조 설립 투쟁과 삼성전자서비스노조 설립 과정에 목숨을 내놓았던 최종범, 염호석 열사 투쟁 등에 함께했습니다. 결국 삼성은 2020년 5월 이재용 회장이 부당 경영권 승계, 노조 탄압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무노조 경영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었죠.

삼성과만 싸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2008년엔 저와 함께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에도 함께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선배에게 미안합니다. 3년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지 6개월밖에 안 되어 가중처벌이 되는 누범 기간일 때였는데 절박한 심정에 국회 점거에 함께해주기를 부탁했습니다. 그것도 결행 전날 밤 선배가 살던 인천까지 쫓아가 급하게 부탁한 일이었습니다. 2008년 7월9일, 그 밤이 어제처럼 선명합니다.

선배는 평생을 삼성에 의한 도청과 감시, 미행 등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야 했기에 그 밤에도 혹시 모를 미행을 피하자며 어느 산자락으로 나를 끌고 갔습니다. 서로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륭전자 비정규직 상황을 공유하고, 다음날 아침 당시 집권여당이던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원내대표실 ‘방문’을 결의했죠. “국제앰네스티 양심수로 세계인권상까지 받은 선배가 함께 가주면 정말 힘이 될 거예요. 선배가 함께 나서주면 민주노총, 금속노조도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주지 않을까요?” 생각하면 그땐 저도 미쳐 있었던가 봅니다.

다음날 일단은 진입에 성공해서 한나라당 원내대표실에 앉아 있던 옛 사진을 보니 선배가 더욱 그립습니다. 그날 함께 들어갔던 정진우 목사님과 김정대 신부님, 효진 스님, 그리고 당시 집단단식 30일째를 맞고 있던 기륭전자분회 조합원 오석순, 강화숙 동지와 선배가 함께 있는 사진인데, 어제인 듯 선명하여 눈물겹습니다. 그 후 선배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농성장에서 ‘비정규직 철폐 1만인 선언’을 호소하며 생애 열 번째 단식에 돌입했죠. 그런 선배의 헌신에 힘입어 실제 1만1천여 명에 이르는 사회적 선언을 조직하는 기적 같은 일도 함께 이뤘죠.

그러나 세상은 점점 더 각박해져서 선배의 그 끈기와 투철함과 집요함을 따라갈 수 없는 많은 이들이 선배의 곁을 떠나 말년엔 참 외로웠죠. 선배 역시 오랜 투쟁 과정에 쌓인 여러 긴장과 피로 등으로 여러 일과 관계 등이 자꾸 가팔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그런 모든 상황이 겹쳐 끝내 뇌졸중으로 쓰러졌겠죠.

‘삼성, 너희가 죽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참습니다. 선배 얘기처럼 “역사가 진실의 시시비비를 반드시 가려줄 것”이니. 이제 모든 건 남은 우리들의 몫이니 이제 그만 모든 이승의 사슬로부터 벗어나 저 하늘에서는 부디부디 평온하고 평화로우시길요. 골리앗 삼성에 맞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싸워준 눈물겨운 진짜 노동자, 김성환 다윗. 수고하셨고, 고마웠습니다.

송경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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