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통산 18승 유소연, 무엇을 하든 ‘유소연답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전 세계 투어 통산 18승과 한국 선수 최초로 5개국 내셔널 타이틀을 석권했던 유소연. 그는 올해 초 16년 동안 골프선수로서 100%의 열정으로 촘촘하고 밀도 있게 채워왔던 투어 생활을 마무리했다. 투어는 은퇴했지만 여전히 골프를 사랑하는 ‘인간 유소연’과의 진솔한 대화를 옮긴다.
유소연은 국내외에서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KLPGA투어 통산 10승, LPGA투어 통산 6승, 유러피언 투어 1승, JLPGA투어 1승 등 전 세계 투어 통산 18승을 기록했다. 특히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5개국(US여자오픈, 한국여자오픈, 일본여자오픈, 캐나다여자오픈, 중국여자오픈) 내셔널 타이틀을 석권해 화제가 됐다.
대단한 기록보다 유소연을 더 빛나게 하는 건 그동안 선수로서 보여준 성숙하고 우아한 모습이다. 골프를 대하는 진지한 자세, 동반 플레이어에 대한 배려, 라운드 중 보여주는 갤러리에 대한 예의, 사랑과 나눔 정신 등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됐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2015년에는 LPGA 기자단이 선정한 ‘가장 우아한 선수상’, 2018년에는 LPGA 동료 선수들의 투표를 통해 투어에서 가장 모범적인 선수에게 주어지는 ‘The William and Mousie Powell Award(2019년부터 The Founders Award로 명칭 변경)’를 수상하기도 했다.
Chapter 1. 8살 때 느낀 손맛, 골프 엘리트 코스로 이끌다
유소연은 8살 초등학교 특별활동 시간에 처음 골프를 접했다. 처음 시작하면서부터 골프가 재미있었고, 재능도 보였다. 어린 유소연을 이끌었던 골프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임팩트 때 느껴지는 손맛이 되게 좋았어요. 어린 나이에 그걸 느꼈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하죠. 그리고 제가 어렸을 때는 골프장이 대부분 모두 산에 있었어요. 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초록이 짙은 숲에서 새소리 듣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는 것도 좋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산과 바다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무조건 산이에요.”
주니어 골퍼 시절부터 두각을 보였던 그는 이후 엘리트 코스를 밟아 나갔다. 2005년 15세이던 중학교 3학년 때 국가대표로 선발돼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여자부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석권한 후 2008년 KLPGA투어에 입문했다. 입문한 해 바로 스포츠서울-김영주골프 여자오픈에서 데뷔 첫 승을 거두었고, 2009년 두산 매치플레이 챔피언십에서는 9홀 연장 끝에 우승을 차지하는 등 카리스마 넘치는 승부사 기질로 일찌감치 스타 선수의 길을 걸었다. 어렸을 때부터 주목받고 스타덤에 오른 만큼 마냥 행복하기만 했을 것 같지만 유소연은 오히려 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승부사다, 똑 부러져 보인다’라는 말을 많이 하세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누구랑 경쟁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고 승부를 즐기지도 못해요. 그래서 왜 나에게 그런 이미지가 생겼나 생각하고 심리상담을 받은 적도 있어요. 상담해주신 선생님이 제가 책임감이 강하고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는 마음이 커서 그런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나를 위한 골프보다 가족을 위해, 때론 국가대표로서 나라를 대표하는 만큼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무게감이 컸거든요. 그렇게 책임감과 무게감 때문에 집중하면서 플레이하다 보니 제가 승부욕이 많은 것처럼 보였을 수 있겠다 싶어요.”
강한 책임감은 때론 버겁기도 하지만, 한편 삶을 견디고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유소연은 미국으로 건너가 더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2011년 초청 선수로 출전한 US여자오픈에서 깜짝 우승하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쓴 뒤 LPGA투어에 데뷔했다. 정식 데뷔한 2012년 LPGA 신인상을 수상하고, 2017년에는 세계 랭킹 1위에 오르며 LPGA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하지만 2018년 마이어 클래식 이후 LPGA투어에서는 승수를 더 쌓지 못했다.
“우승했을 때도 어떻게 이 타이틀을 유지할지, 또 어떻게 또 다른 우승을 할지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세계 랭킹 1위가 됐을 때도 어떻게 이 자리를 지킬지 생각하기 바빴어요. 그러니 우승을 해도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죠. 그러면서 오히려 감정의 굴곡이 심해지고 성적도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우승과 멀어지고 성적이 떨어지면서 한동안 어둠의 긴 터널 속에 있는 듯했다. 그러다 답답하고 막막한 시간 속에서 벗어나게 해준 건 코로나19로 인한 강제 휴식이었다.
“10년 넘는 투어 생활 동안 항상 짐을 싸고 대회장으로 이동하는 생활을 반복하면서 긴장된 삶을 살았죠. 그러다 코로나19 때 한국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여러 가지를 느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안정된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도 생기고… 그리고 내가 그동안 결과만 보고 살지는 않았다는 걸, 과정을 더 즐기는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기도 했죠.”
이런 깨달음은 자신을 응원해주는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우승을 골프 인생의 전부로 생각하던 시점에서 벗어나 사랑과 봉사를 골프 앞에 놓게 되는 삶으로 이어진 것이다. 유소연은 2020년 2월 호주에서 열린 LPGA투어 ISPS 한다 빅 오픈과 ISPS 한다 호주여자오픈의 상금 일부를 산불 및 야생동물 구호 활동에 기부했고, 2020년 한국여자오픈 우승 당시에는 상금 2억5000만 원 전액을 코로나19 관련 활동에 기부해 화제가 됐다. 이러한 그의 사랑과 감사, 봉사의 마음은 2020년 LPGA 홈페이지에 기고한 에세이에서도 잘 드러난다.
‘트로피는 시간이 지나면서 색이 바랜다. 돈은 물질적인 안정만을 제공할 뿐이다. 골프에서 한 대회 우승하면 일주일 동안 우승자가 되고 1년간 디펜딩 챔피언이 된다. 하지만 골프가 나에게 허락한 긍정적인 영향은 나로 하여금 마이어 푸드뱅크부터 호주 산불 구호 지원금 기부, 코로나19 퇴치를 위한 성금 등 내가 할 수 있는 자선 활동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돕는 것이다. 이런 것은 지속성이 있다. 그래서 나에게 영감을 주고 계속 하게끔 원동력이 된다.’ - LPGA 홈페이지에 기고한 에세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 중 일부
유소연은 19살 때부터 멘털 관리를 위해 스포츠 심리 전문가 조수경 박사와 꾸준히 심리상담을 해왔다. 2018년부터는 고진영, 리디아 고 등의 코치로 유명한 정그린 대표와 심리상담을 해오고 있는데, 주된 내용은 인간 ‘유소연’에 대한 탐구다.
“어느 순간 골프선수 유소연은 잘 알겠는데, 사람 유소연은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해서 발견한 ‘나’는 새로운 것을 배우며 자기 자신에 대해 계속 알아가는 걸 좋아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는 거였어요.”
‘인간 유소연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럽게 은퇴에 대한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 어느 순간 골프를 위해서 인생의 다른 부분을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오랜 투어 생활에 지쳐 안정된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컸고, 선수로서 경쟁력이 점점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021년부터 시작된 고민이었지만 은퇴 의사를 밝혔을 때 주변 사람들은 갑작스럽다며 놀라기도 했다.
“저는 뭔가 결정할 때 여기저기 묻고 조언을 구하기보다 혼자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는 스타일이에요. 독립적인 성향인 데다 골프도 부모님이 간섭하는 걸 싫어해서 스스로 알아서 했거든요. 부모님께서도 이런 저의 성향과 의견을 인정해주셨고요.
✽V157 언니들에게 은퇴 얘기를 했을 때 당황하더라고요. 제가 그동안 힘든 일을 토로하고 고민을 나누긴 했어도 은퇴 얘기를 꺼낸 적은 없거든요. 특히 인비 언니가 어떻게 그렇게 은퇴를 빨리 결정하냐며 놀라긴 했죠.”
*유소연은 박인비, 최나연, 김하늘, 이보미, 신지애, 이정은5와 2018년부터 ‘V157’이라는 친목 모임을 하고 있다. V157이란 당시 7명의 국내외 대회 승수를 합한 숫자에서 딴 것이다.
Chapter 3. 무슨 일을 하든 ‘유소연답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은퇴 후 유소연은 “시원섭섭하겠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는다. 하지만 그는 ‘정말 섭섭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어느 하나에 온전히 몰두하고 최선을 다했을 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선수 시절에는 투어 생활에 100% 열정을 쏟았고, 은퇴한 지금은 걱정과 후회 없이 자신이 내린 결정을 뒤돌아보지 않는다.
은퇴는 했지만 일상은 여전히 루틴 있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고 선수 시절처럼 압박감 있는 루틴은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발레나 필라테스를 하고, 오후에는 강아지 산책시키고 일정에 맞춰 외출하는, 단순하면서 평온한 루틴이다. 그렇게 일상을 소소한 행복으로 채워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투어 생활에 맞춰 빽빽하게 루틴 있는 삶을 살았던 터라 은퇴 후의 일상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싶은 걱정이 좀 있었어요. 제가 할 일이 없어 빈 시간을 때우는 걸 싫어하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성격상 어떤 상황에서도 루틴을 만드는 것 같아요.”
선수 생활은 은퇴했지만 유소연에게 골프는 여전히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간혹 그가 골프가 싫어서 은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오히려 은퇴 후 골프 치는 게 더 재미있다고. 선수 시절에는 실수를 하면 미스샷의 원인을 분석하고 수정하느라 촉수를 세워야 했지만 이제는 부담 없이 더 순수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올해 타이틀리스트와 앰배서더 계약을 맺고 활동 중이며, 앞으로도 골프와 관련된 다양한 일을 모색할 생각이다.
“골프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운 만큼 앞으로 골프계 다양한 방면에서 이바지하고 싶어요. 주니어 선수를 돕는 일도 좋고, 골프장 디자인에도 관심이 많아 아니카 소렌스탐이나 캐리 웹처럼 기회가 된다면 코스 디자인을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유소연답다’라는 말을 들으면 좋을 것 같아요. 다양한 활동을 하며 나중에는 골프계에 좋은 영향력을 미친 선수로 기억된다면, 그게 가장 보람된 일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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