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50년 전 ‘새마을 연극’인가
시대착오 감각이 불어오는 묘한 아이러니
<활화산>은 한국 사실주의 희곡의 대가 차범석(1924~2006)이 활동 전성기였던 1973년 집필해 이듬해 선보인 작품이다. 국립극장 초연 당시 이해랑이 연출하고 백성희·장민호·손숙·신구 등 올스타급 배우가 캐스팅됐다. 당시 16개 도시에서 순회 공연했고, 녹화된 공연 실황이 방송되기도 했다.
이후 이 작품은 50년간 공연되지 않았다. 이유가 있다. <활화산>은 박정희 정권의 핵심 사업인 새마을 운동을 홍보하는 프로파간다 연극이었기 때문이다. 가세가 기울어가는 경북 농촌 마을 양반댁의 막내며느리 정숙이 구습을 타파하고 잘사는 농촌으로 변모시킨다는 내용이다. 새마을 운동의 모범이 됐던 실존 인물의 삶을 모티브로 삼았다.
국립극단은 차범석 탄생 100주기를 앞두고 실험적인 연출가 윤한솔에게 차범석 희곡의 연출을 의뢰했다. 윤한솔은 차범석 전집을 모두 읽은 뒤 <활화산>을 골랐다. 이 소식을 들은 연구자와 재단은 우려를 표했다. ‘굳이 왜 그 작품을…’이라는 반응이었다. 최근 기자들과 만난 윤한솔은 “처음엔 1970년대에 여성이 변화의 주체가 된 희곡을 썼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 작품이 새마을 운동을 선전하기 위한 목적극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며 “2024년에도 프로파간다 연극이 가능한지 질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윤한솔은 5막 구조를 1, 2부로 바꾼 정도를 제외하면 각색·윤색 없이 <활화산>을 그대로 올렸다. 1부에선 13대째 종가 이씨 집안이 허례허식에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매일 주변에서 쌀이며 닭이며 꾸는 처지에 관혼상제를 지키며 이런저런 감투도 욕심을 낸다. 가문의 큰 어른이던 이 노인이 세상을 뜨자 막내며느리 정숙은 “저한테 맡겨 주시겠습니까?”라는 말을 남긴 뒤 2부부터 직접 돼지를 치고 감을 말리는 등 가난을 몰아내기 위해 나선다.
극 중 ‘새마을 운동’ 같은 단어가 나오진 않지만, 윤한솔은 “정숙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나 정부 문건에 나오는 기조와 거의 같은 말을 한다”고 전했다. 정숙이 돈과 노동을 갹출해서 마을에 다리를 놓자고 주민들을 설득하는 일장 연설은 종반부 하이라이트다. 지역 국회의원은 선거철만 되면 다리를 놓아준다고 공약한 뒤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다가 다음 선거 때면 같은 말을 반복한다. 정숙은 “우리 자신이 능력이 있어도 안 하는 것과 능력이 없어서 몬하는 것을 분명히 하자는 것입니더(…) 이제는 아무도 믿을 사람은 없습니더. 오직 있다면 우리 자신 뿐입니더!”라고 외친다. 정치에 대한 불신을 기조에 깔며 자력구제를 내세우는 연설에는 당대의 포퓰리즘 정서가 깔려있고, 이는 2024년 상황과도 묘하게 공명한다. 윤한솔은 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히틀러의 연설 영상까지 참고했다. 윤한솔은 “‘반응하는 개인’만 남은 사회에 집단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프로파간다가 가능할까. 관객이 극장을 나서면서 ‘어, 그런데…’라고 자문하게 되면 성공”이라고 말했다.
기묘한 세트와 오브제는 다시 태어난 <활화산>에 아이러니를 더한다. 1부 막바지에 검은 옷을 입은 스태프가 배우 뒤로 당당히 등장해 기와집 위에 무언가 장치를 한다. 이 노인의 사망 이후 집은 통째로 하늘로 들려 올라가고, 그 아래로 이 노인의 거대한 사진이 떠오른다. 2부에서 정숙이 키우는 돼지는 마치 봉준호 영화 <옥자>에 나오는 슈퍼돼지처럼 거대하다. 이 돼지는 무대 한가운데서 빙글빙글 돌거나, 때로 괴수처럼 울부짖는 소리를 내 인간의 대사를 방해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서사의 흐름이나 대사의 표현에는 역시 대가다운 기운이 있다. 다만 50년 전 독재정권 시절의 프로파간다와 포퓰리즘이 오늘날의 정서와 충돌해 균열이 드러난다. 윤한솔은 차범석의 서사와 대사를 능청스럽게 살리면서도 이 균열의 지점을 포착해 극대화한다. 1974년 세워진 극의 구조와 2024년의 리모델링 사이, 관객은 혼돈과 모순을 느낀다. “연극은 사회의 거울”이라는 차범석의 창작관은 이런 방식으로 확인된다. <활화산>은 6월 17일까지 서울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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