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소득층은 정말 정부 덕에 '인플레 고통' 덜었나 [마켓톡톡]

한정연 기자 2024. 5. 3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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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계층별 인플레 피해 분석
“저소득층, 정부 도움으로 소비 유지”
하위 20%, 2분기 연속 소비 감소
美 연은 “저소득층 인플레 고통 지속”

인플레이션으로 고통을 받는 것에도, 이를 극복하는데도 순서가 있다. 팬데믹 이후 저소득층일수록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고통이 깊고 오래갔으며, 고소득층일수록 회복이 빨랐다. 하지만 한은이 최근 공개한 보고서는 저소득층의 인플레 피해가 심했지만, 정부의 도움으로 소비를 유지했다고 주장했다. 정말 그랬을까.

윤석열 정부의 정책은 과연 저소득층에 온기를 줬을까. [사진=뉴시스]

"높은 인플레이션은 이를 감당할 능력이 가장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거운 부담을 준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은 2022년 8월 잭슨홀미팅 연설에서 "물가 안정이 없으면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강력한 노동시장을 오래 유지할 수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연준은 매년 8월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각국 중앙은행장 등을 초청해 심포지엄을 연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2022년 참석했다.

한국은행이 5월 27일 공개한 '고물가와 소비, 가계 소비 바스켓·금융자산에 따른 이질적 영향'이라는 보고서의 골자는 인플레이션이 누구에게 가장 무거운 부담이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하지만 미디어들은 소득 하위 20%가 아닌 금융자산 가치가 하락한 '30대 전세 거주자'의 인플레 피해에 집중했다. 인플레가 저소득층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힌다는 상식과는 다른 결과다. 보고서엔 특별한 발견과 내용이 들어 있었을까.

■ 가난한 자의 형벌=한국은행 보고서는 "가계의 소비 구성을 고려한 실효 물가상승률은 식료품 등 필수재 비중이 큰 고령층과 저소득층(소득 하위 20%)에서 높게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한마디가 더 있었다. 보고서는 "다만 저소득층은 고령자 비율이 높아서 공적 이전소득이 증가했고, 이를 통해 저소득층 소비 위축이 완화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초인플레이션에 대입해 보면 물가 상승의 고통이 저소득층에 집중된다는 평범한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물가가 상승하면, 화폐의 가치는 떨어지고, 부동산과 같은 실물자산의 가치는 올라간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19년 발표한 책 「평화의 경제적 결과」에서 "정부는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을 통해서 시민들의 중요한 자산을 몰래 빼앗을 수 있다"며 "독일에 1차대전 배상금으로 너무 많은 금액을 책정하면, 유럽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독일에서 월간 물가상승률이 300%가 넘는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은 케인스의 경고가 있은 지 2년 만이었다. 계란 한 알 가격은 1913년 0.08마르크에서 1923년 8월 5000마르크로 뛰더니 11월에는 800억 마르크가 됐다.

한은 보고서에도 물가 상승으로 인한 고통이 저소득층에서 가장 심했던 것을 보여주는 통계가 있다. 한은 보고서에 삽입된 '소득분위별 누적 실효 물가상승률' 그래프를 보면, 소득 하위 20%의 실효 물가상승률은 팬데믹이 시작한 2020년 1.2%, 2021년 4.7%, 2022년 11.1%, 2023년 15.5%로 치솟았다. 반면 소득 상위 20%의 실효 물가상승률은 2020년 0.7%, 2021년 4.5%, 2022년 10.4%, 2023년 14.2%로 낮았다.

■ 고소득과 저소득의 갈림길=그렇다면 한은 보고서가 주장한 것처럼 정부 지원을 받은 저소득층의 소비는 정말 탄탄했을까. 아니다. 오히려 줄었다. 소득 하위 20%는 물가상승률이 완화하고, 소득이 다시 늘어난 올해 1분기에도 소비를 줄였다.

통계청의 2024년 1분기 가계동향 조사에 따르면 소득 하위 20%의 지난해 4분기 월평균 소득은 1년 전보다 0.7% 줄어든 112만2000원이었고, 올해 1분기에는 7.6% 늘어난 115만7000원이었다. 하지만 하위 20%의 소비는 지난해 4분기에 5개 소득층 중 유일하게 1.5% 줄었고, 올해 1분기에도 1년 전보다 0.6% 감소했다.

저소득층 소비는 도저히 줄일 수 없는 한계에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소득 하위 20%는 올해 1분기 전체 지출에서 식료품·비주류음료에만 20.5%를 썼고, 주거비에 22.5%를 썼다. 이 기간 소득 상위 20%의 지출에서 식료품·비주류음료(11.1%), 주거비(9.8%) 비중은 하위 20%의 절반도 안 된다.

저소득층은 인플레이션으로 식료품과 주거비가 증가하자 교육비부터 줄였다. 하위 20%가 교육에 전체 지출의 1.0%를 지출할 동안 소득 상위 20%는 지출의 12.1%를 썼다. 하위 20%의 교육비는 월평균 1만3000원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더 줄이고 있다.

저소득층은 지난해 4분기 교육비를 13.9% 줄이더니 올해 1분기에는 무려 42.4%를 줄였다. 소득 하위 20%의 정부 이전소득은 1년 전보다 11.1% 증가했지만, 저소득층의 소비 구성을 보면 정부가 도와줘서가 아니라 더 줄일 게 없어서 소비를 덜 줄인 것으로 보인다.

■ K자형 양극화 경기 회복=인플레이션 시대에 저소득층과 중산층, 고소득층의 차이는 고통에 국한하지 않는다. 소득이 낮을수록 인플레의 고통은 더 오래간다. 가령, 팬데믹 기간엔 유가가 가장 문제였는데, 교통비 비중이 높은 고소득층에 이 충격이 먼저 오고, 시간이 흘러 인플레이션이 주거비와 필수품으로 전이돼 저소득층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행은 최근 보고서에서 저소득층이 정부 이전소득 증가로 인플레 고통을 덜었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서울시 중구 한국은행 본부 모습. [사진=뉴시스]

뉴욕연방준비은행이 지난해 발표한 '소득과 인종에 따른 인플레이션 격차' 보고서는 인플레이션 갭으로 저소득층의 고통이 더 오래가는 '인플레이션 불평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가 상승의 압력 요인인 인플레 갭은 실질 GDP가 완전고용시 GDP보다 더 높을 때 발생한다.

보고서는 "소득 하위 40%는 인플레 초기에 낮은 교통비 비중으로 평균 실효 인플레이션보다 0.4%포인트 낮은 수준을 경험하지만, 교통비 물가가 평균으로 낮아져도 주거비와 식료품 가격이 평균 이상 오르면서 제일 높은 인플레이션을 가장 오래 경험한다"고 결론 내렸다.

소득이 낮을수록 인플레이션의 고통은 크게 작용하지만, 고용률 회복은 훨씬 더디다. 이는 저소득층의 소득에 다시 영향을 미쳐 인플레이션에 더 취약하게 만든다. 반면 소득이 높을수록 고용률 회복은 빠르다. 이는 팬데믹에서 회복할 때 소득에 따라서 그래프가 K자형을 그린다는 뜻이다.

미국 하버드대학과 브라운대학의 공동 연구 프로젝트(Opportunity insights)에 따르면 팬데믹 영향으로 2020년 5월 미국의 소득 하위 30% 고용률은 -35%, 소득 상위 30%는 -13%를 기록했다. 하지만 불과 11개월 만인 2021년 4월 소득 상위 30% 고용률이 0%로 팬데믹 이전으로 회복했지만, 소득 하위 30% 고용률은 여전히 -29.9%였다. 국내에는 소득 구간별 고용 통계가 없다.

베시 스티븐슨 미시간대 경제학과 교수는 CNBC와 인터뷰에서 "저소득층 고용 회복이 느린 건 팬데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고통이 저임금 근로자가 많은 외식 산업 등에 집중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불평등은 인플레이션 시기에 더욱 깊어지고, 저소득층의 인플레 고통이 가장 세고 오래간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jayhan0903@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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