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R&D ‘정치 구호’ 경계해야 한다[시평]

2024. 5. 3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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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윤 한양대 정책과학대학 교수
카르텔 몰렸다가 확대 급선회
국가가 해야 할 과제에만 집중
시대 변화에 기민한 반응 중요
국산화율 세계 최초 연연 말고
실사구시로 R&D 효율 높여야
정교한 정부 사업계획은 기본

정부 연구·개발(R&D)이 지난 1년처럼 세간의 화제가 된 적도 없을 것이다. 카르텔로 몰려 삭감 쇼크를 겪었다가 대폭 확대라는 횡재를 누리게 됐다. 경과가 어쨌든 정부의 오락가락 행정과 정책 결정이 설왕설래의 소재가 되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VUCA(급변·불확실·복잡·모호) 시대에 선진 문명국으로 뿌리내리려는 우리로서는 정부 R&D가 거의 유일한 밑천이다. 이에 정부 R&D가 지향할 바를 정리해 본다.

첫째, 정부 R&D는 국가 전략의 수단이 돼야 한다. 나라가 나아갈 길, 또는 국민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있어 어려운 순간순간과 매 고비고비를 R&D가 메워주고 다리를 놓아 주며, 점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과거 선진국의 예를 들면서 실용적인 목적과 완전히 분리된 자유로운 기초 연구를 정부 R&D의 목표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한다. 하지만 과학기술 정책의 이면을 냉정하게 살펴보면, 선진국도 그리 순수하게 하지 않았으며 기초라는 개념도 더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정부 R&D와 민간 R&D를 구분해 국가가 해야 할 바에 집중해야 한다. 잘못해서 민간 R&D에 국가가 개입하면, 우선 민간이 R&D를 슬슬 회피하는 혼잡효과(crowding-out effect)를 초래하기도 하고, 무임승차를 조장하기도 하는 부작용이 있다. 또한, 국가의 경직성이 민간의 유연함과 탄력성을 잠식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정부 R&D가 민간 R&D를 대체하거나 중복될 가능성에 대해 엄중히 경계해야 한다. 이번에 수십조 원의 거대한 재정을 투입하는 반도체 분야 정부 R&D에서 특히 조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지역 민원에 휘말리며 지방 부패의 뒷돈으로 전락할 우려 때문이다.

셋째, 매우 탄력적이고 시대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한 길만 뚜벅뚜벅 걷는 멋진 모습은 개인의 미덕이며 진정성일 수 있다. 그러나 정부 R&D를 그런 사소한 덕목에 휘둘리게 해서는 안 된다. 지정학적 변화와 과학기술의 격변에 극도로 예민하게 목적과 수행 방법, 절차들을 탄력적으로 대응시켜야만 한다. 더러는 우리나라 R&D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실패를 용인한다는 둥 실패를 강조하기도 하는데, 본질은 실패가 아니라 지정·지경학 환경과 과학기술 트렌드 변화에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데 있다. 실패를 찾으려고 구태여 애쓸 필요는 없다.

넷째, 정부 R&D는 정치적 구호나 정서적인 소망과는 엄중히 구별돼야 한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의 큰 특징 중 하나는, 글로벌 표준과 여러 기준이 선진국에 의해 이미 오래전 특정됐고, 우리는 그에 동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만의 무엇을 멋지게 해 보이겠다는 목적은 국민의 심금을 울리는 좋은 정치적 선전일 수는 있으나 실현 가능성은 작고 낭비의 요소가 많다. 국산화, 우리만의, 세계 최초·최고, 한계 극복, ○○안보 등 예쁜 구호는 많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돼선 절대로 안 된다. 실례로 우리나라 방위산업이 최근 들어 국제적 경쟁력을 자랑하게 된 연유를 살펴보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과거 수십 년간 매우 요령 있게, 때로는 비굴할 정도로 방위산업 관련 선진국의 기술을 공식-비공식적으로 수입했다. 여기에 기업들의 기술 발전과 서로 호응하면서 자체적인 플랫폼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어느 순간 나름 괜찮은 플랫폼을 갖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국산화율 같은 구호에만 매달려 폐쇄적으로 준비했다면 실현 가능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

다섯째, 정부 R&D 사업계획서가 그간의 관례에 비해 수십 배 구체적이고 정교해야 한다. 과거에는 R&D나 도로 건설의 사업계획서가 거의 유사했다. R&D 자체가 모방하거나 개선하는 데 그쳤으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 허술한 사업계획안을 예비타당성조사 과정에서 많은 연구자가 참여하고 기획해 계획을 완성해 온 것이다. 예타에 많은 기간이 걸린 이유 중의 하나가 이 과정이었다. 예타가 면제돼 이 과정이 생략되면 정부 R&D 계획이 부실해지지 않을까 하는 큰 우려가 있다. 계획이 부실하면 당연히 나눠 먹기와 밀당과 더 나아가 카르텔이 기승을 부리게 된다. 혹시라도 그렇게 되면 정부 R&D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믿음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김태윤 한양대 정책과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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