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기의 D사이언스] "대체불가 방사선 기술 확보… 원자력 이어 방사선 선도국으로"

이준기 2024. 5. 30.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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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능성으로 최초 기술 개발
입사 후 타 분야 배정된 후 주1회 쉬며 매진
연구 6개월만에 SCI논문 발표·특허 등 성과
18년간 천연잔디 연구 몰두 함량제고 기술 개발
핵심가치 '대체불가 방사선 강점기술'
방사선 다양한 분야 적용땐 새로운 특성 발현
물리화학적 특성 극대화한 한계돌파형 기술
신약·이차전지 등 미래시장 선점 가능성 시사
K-방사선, 세계를 선도한다
2005년 정읍서 시작한 인프라 완비 유일기관
IAEA협력센터 3연속 지정… 해외서 인정 받아
美·佛 등 강국 리드하는 방사선분야 '아·태 허브'
한국원자력연구원 제공

이준기의 D사이언스 정병엽 한국원자력연구원 첨단방사선연구소장

"원자력연구원의 양대축은 원자력과 방사선입니다. 그중 원자력 분야는 '5대 강국'에 진입했지만 방사선은 첨단방사선연구소 설립 이전까지 등수조차 매기기 힘든 수준이었죠. 20년이 흐른 지금 첨단방사선연구소는 세계적인 방사선 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앞으로 우리만의 '대체불가 방사선 강점기술'을 토대로 방사선 산업 생태계를 혁신하고 미래 첨단 산업을 선점하는 첨병 역할을 하겠습니다."

정병엽 한국원자력연구원 첨단방사선연구소장의 말에 자신감이 넘쳤다. 지난 20년 간 1%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도전해서 결과를 만들어 왔던 숱한 성공 DNA를 첨단방사선연구소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소 입구에는 '가능성에 깃들어 살자'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정 소장은 "우리 연구소는 방사선 연구 인프라와 우수한 연구인력이 집적해 있는 '대한민국 방사선 연구의 요람이자 세계 최고 연구소'라고 감히 자부한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개량 신약, 전고체 전지, 내방사선 반도체 등 방사선 기술을 첨단산업에 적용해 공정 효율을 대폭 높이는 3세대 '대체불가 방사선 강점기술(NFRT)'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출연연의 공공기술 사업화를 위해 전북도와 정읍시 등 지자체, 중앙정부 등과 협력하고 있다.

그는 "원자력연의 연구소기업 10개 중 7개가 첨단방사선연구소의 기술을 통해 설립됐고, 그 중 1호 연구소기업인 콜마비앤에이치는 국내 연구소기업의 성공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며 "앞으로 '제2의 콜마비앤에이치'를 탄생시켜 방사선 기술로 국민 삶의 질을 높이고, 과학기술을 통해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대담=이준기 ICT과학부장

◇의대 실패가 가져다 준 '과학자'의 길

정 소장은 대학 입시에서 첫 실패를 맛봤다. 공부를 잘 했던 그와 비슷한 성적의 친구들이 의대에 지원했듯이 뚜렷한 목표와 이유 없이 의대 시험을 봤다가 불합격했다. 대신 2지망으로 써낸 농화학과에 진학했지만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무작정 군대를 다녀와 복학한 후 그는 달라졌다. 그는 "복학하고 나서 공부에 재미를 느껴 무작정 학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두 분 교수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유학을 준비하게 됐다"며 "교수님이 대학원 시절 공부하던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2년 반의 석사과정을 거치면서 연구에 임하는 치열함을 배웠다"고 떠올렸다.

연구에 대한 치열함과 간절함은 그를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석사 졸업 후에는 영국 옥스퍼드대와 일본 도쿄대 두 곳 대학의 박사과정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는 영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정부 장학금을 주기로 한 일본으로 박사과정을 떠나 연구와 학업을 이어갔다.

3년 만에 박사학위를 마치고 곧바로 미국으로 다시 유학을 떠나 1년 6개월의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마치고, 미국 교수의 추천서를 받아 한국원자력연구원에 들어와 본격적인 연구자 길을 걷기 시작했다.

◇생물학에서 '방사선 연구자'로 연구인생 '변경'

원자력연에서 처음 배정받은 연구실은 방사선 관련 분야였다. 선배 연구원으로부터 지시받은 건 SCI(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급 논문을 쓰라는 것. 생물학을 전공한 그에게 방사선은 전혀 생소하고 낯선 분야였다. 난감했지만 방사선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일요일 하루만 쉬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자정이 넘어 퇴근할 정도로 방사선 연구에 매진했다.

정 소장은 "SCI 논문 1편을 6개월 만에 낼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7년 간 10편이 넘는 논문을 더 낼 수 있었다"면서 "뒤늦게 알고 보니 우리 연구실을 3년 후에 없애기로 했는데, SCI 논문과 특허 등의 성과를 지속적으로 낸 덕분에 유지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연구 프로젝트를 책임지는 과제책임자가 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입사해서 7년 동안 휴가를 쓴 게 10일도 안 될 만큼 많은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냈다"면서 "그것이 지금까지 연구를 지속하고, 실질적인 성과를 내는 연구를 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돼 줬다"고 설명했다.

◇'천연잔디 박사' 명성…연구소기업 설립 등 기술사업화 '전력'

정 소장은 18년 간 방사선을 활용한 천연잔디 연구에 매달렸다. 2012년 세계 최초로 난지형 잔디의 일종인 '센티페드그라스'에서 메이신으로 불리는 추출물을 분리·정제하고, 방사선 기술을 이용해 극미량의 함량을 높이는 기술을 개발했다. 메이신은 옥수수 수염에서 처음 발견된 항산화 기능성 성분으로, 생리활성 능력이 뛰어나지만 화학적 합성이 불가능하고 센티페드그라스에만 아주 적은 양으로 존재하는 희소성의 고부가가치 천연물이다.

그는 "평소 기초연구와 응용연구를 4대 6 비중으로 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기초·원천기술 확보를 위한 연구한 끝에 메이신 관련 다수의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며 "개발한 기술을 사업화해야 한다는 생각에 특허기술 7종을 기업에 이전했고 최근에는 기술출자를 통해 연구소기업을 만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 소장은 메이신 관련 기술을 첨단방사선연구소 입주기업인 에코드림에 10년 간 기술료를 받고 이전한 데 이어, 2022년 원자력연 8호 연구소기업으로 설립된 바이오메이신에 기술출자도 했다. 바이오메이신은 설립과 함께 자외선 차단, 미백·주름 개선, 노화 방지 등의 고기능성 화장품을 출시해 첫해 20억원의 매출을 달성, 뷰티 업계로부터 주목 받았다. 현재는 원료 공장을 새로 짓고, 발모와 당뇨, 치매 등 제약바이오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마법과 같은 방사선…'대체불가 기술'로 미래 시장 연다

그는 방사선의 물리화학적, 생물학적 특성에 주목해 다양한 연구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 방사선의 독특한 특성을 다양한 분야에 적용하면 이전에 없던 새로운 특성이 발현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연구 가치를 만들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정 소장은 "방사선은 다양한 활성산소종을 생성하고, 종이부터 강판까지 물체를 잘 투과하기 때문에 이런 특성을 잘 연구하면 산업 분야에 활용성이 매우 높다"고 설명했다. 활성산소를 이용하면 세포 내 물질을 화학적으로 변화시켜 식품, 의료, 농업, 반도체, 이차전지, 신약 등에 널리 적용할 수 있다.

그는 "연구소 설립 후 식품 멸·살균, 방사선 육종, 전선 가교, 방사성의약품 개발 등 전통적 분야에 활용하기 위한 1세대 방사선 기술 개발에 주력해 이 분야는 지금도 탄탄한 산업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며 "방사선 기술을 다른 산업에 융합하기 위해 시도한 2세대 방사선 융합기술(RFT)은 연구 확장성의 한계 때문에 기대한 만큼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작년 소장에 취임한 후 '3세대 특화형 방사선 융합기술(TRFT)'을 연구소가 지향할 핵심 가치로 정했다. 이 기술을 '대체불가 방사선 강점기술(NFRT)'로 명명했다. 정 소장은 "대체불가 방사선 강점기술은 방사선의 물리화학적 특성을 극대화한 한계돌파형 기술로, 다른 기술로 대체가 불가능하고 기존 제조공정 대비 60% 이상 효율을 높이는 등 두 가지 기준에 적합한 기술을 발굴·개발하는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대체불가 방사선 강점기술에 R&D 역량을 집중해 개량 신약·백신, 전고체 이차전지, 내방사선 반도체 등 미래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구상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연구소

첨단방사선연구소는 2005년 전북 정읍 첨단과학산업단지에 설립됐다. 이후 인근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안전성평가연구소 등 정부출연연구기관 지역 연구조직이 차례로 들어섰다. 첨단방사선연은 출연연 분원 조직 중 이 곳에 가장 먼저 자리 잡았다. 방사선 연구 인프라를 모두 갖춘 국내 유일의 연구기관이기도 하다.

정 소장은 "첨단방사선연은 전체 출연연 중 부지 규모에서 톱 5에 든다. 전북도와 정읍시의 도움으로 쾌적한 공간을 확보한 덕분"이라면서 "설립 당시 1개였던 건물은 약 20년 만에 28개로 늘었다. 매년 1개 이상의 건물이 새로 들어섰을 만큼 지자체와 중앙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고 했다.

1호 연구소기업이자 한 때 1조원 이상의 시가총액을 기록한 콜마비앤에이치도 2006년 첨단방사선연의 기술출자를 통해 설립됐다. 원자력연의 9개 연구소기업 중 7곳이 첨단방사선연의 기술로 기업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런 성과 덕분에 기업 보육과 실용화 연구지원을 위한 실용화연구동에는 16개 기업이 입주해 다른 기업을 수용하지 못한 지 이미 오래됐다. 입주하기 위해 1년 이상 대기하고 있는 기업도 2개나 된다"고 소개했다.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방사선 기술 분야 '국제원자력기구(IAEA) 협력센터'로 3회 연속 지정됐다. 3회 연속 지정은 첨단방사선연이 세계적으로 유일하다. 아울러, 아·태 국가 대상 방사선 교육 훈련과 기술 지원 등을 통해 아·태 지역 방사선 연구분야 허브 위상을 확보했다.

정 소장은 "지금은 우리나라가 미국, 프랑스, 일본, 인도 등 전통적인 방사선 연구 강국을 따돌리며 세계를 리딩하는 수준"이라며 "방사선 기술을 보다 광범위한 산업 분야에 적용하기 위해 노후화된 연구장비·인프라 개선, 첨단 산업과의 접목을 통한 기술 혁신, 국내 주도의 글로벌 협력 강화에 힘쓰겠다"고 말했다.이준기기자 bongchu@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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