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복 · 무시 · 거부… 부서지는 국제질서[Global Focus]
네타냐후, ICC 영장 청구에도
라파 공격 강행… 수십명 사망
러시아-우크라 전쟁도 못막아
이스라엘-하마스 휴전 결의안
안보리, 미국 거부로 성과못내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흐름에
WTO의 위상 갈수록 약해져
中·印 자본에 IMF 역할 축소
제2차 세계대전 후 만들어진 국제기구들이 힘을 잃고 있다.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최남단 도시 라파에 대한 공격 중단을 명령했지만, 이스라엘이 불복한 게 상징적인 장면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역시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들이 사실상 안보리 결정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자유로운 무역과 이를 통한 공동 번영이라는 취지로 만들어진 세계무역기구(WTO) 등 경제 관련 국제기구 역시 강대국들의 보호무역주의 기조 강화에 힘을 잃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평화와 공동 번영을 이뤄냈던 국제기구들이 신냉전 체제로 기존 국제 질서가 해체될 위기를 맞은 상황과 맞물려 흔들리는 모양새다.
◇‘두 개의 전쟁’ 막지 못한 ICJ와 ICC = 유엔 최고 법원인 ICJ가 이스라엘에 라파 공격을 즉각 중단하라고 명령했지만 이스라엘은 라파를 비롯한 가자지구 전역에 대한 공격을 이어갔다. 최근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한 데 이어 ICJ까지 이스라엘의 공격에 제동을 걸려 했지만 이스라엘은 아랑곳하지 않는 모양새다. 특히 ICJ의 긴급명령 이틀 뒤 라파 서부에 위치한 탈 알술탄 난민촌에서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어린이를 포함한 수십 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국제사회의 비판 여론이 거세게 일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그만큼 ICJ나 ICC의 결정을 뒷받침할 강제적 수단이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ICJ의 명령은 법적 구속력은 가지지만 당사국이 이를 이행하지 않아도 강제할 수단은 없다.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국제 법원은 위반 행위를 처벌하지만 이러한 판결을 집행할 세계적 경찰(global policeman)은 없다”고 지적했다. 유엔 안보리가 이와 관련한 결의안을 추진하면 보다 높은 수위의 압박을 할 수 있지만 상임이사국이자 이스라엘 동맹국인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
ICJ의 결정에 앞서 카림 칸 ICC 검사장은 지난 20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관련 범죄, 인도에 반한 죄를 저지른 혐의로 하마스 군사·정치 지도자 3인과 함께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 요아브 갈란트 국방부 장관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했다.
민사법원과 유사한 성격의 ICJ는 주로 국가 간 분쟁 해결을 위해 국제법을 적용하지만 대량 학살 협약에 대한 관할권을 갖고 있다. 유엔의 주된 사법기관 중 하나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상설국제사법재판소를 계승했다. 유엔 총회 및 안보리에서 선출된 15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며 국제법을 적용해 심리하지만 판결의 구속력은 강하지 않다. ICJ 스스로 ‘국제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유엔의 기조에 따라 상대국의 강한 반발이 예상되는 제재를 가급적 피하는가 하면, 그나마도 국제사회의 힘의 논리에 의해 ICJ의 결정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형사 재판과 유사한 ICC는 집단살해죄(crimes of genocide), 전쟁범죄(war crimes), 반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를 저지른 개인을 형사 처벌하기 위해 설립된 세계 최초의 상설 전쟁범죄재판소로 2002년 7월 1일 발족했다. 1998년에 마련된 로마조약에 근거해 발족됐다. 이코노미스트는 “ICC의 가장 큰 문제는 수십 개의 국가가 ICC에 참여하길 거부했기 때문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며 “그중 미국, 러시아, 중국, 인도, 이스라엘이 포함된다”고 한계점을 지목했다. ICC 회원국은 130여 국에 불과하다.
ICJ와 ICC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이후 계속되는 전쟁도 막지 못하고 있다. ICJ는 2022년 러시아에 대해 우크라이나 공격을 중단하라고 명령했지만 러시아는 ‘당연히’ 이를 무시했다. ICC는 지난해 3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피고인 없이라도 재판에 세우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 역시 푸틴 대통령의 운신의 폭만 다소 줄였을 뿐이다.
유엔 안보리 역시 강대국들이 번갈아 거부권을 행사하며 사실상 국제분쟁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사 역할에는 손을 놓고 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휴전 결의안에 대해서는 미국이 계속 거부권을 행사했다. 지난달에는 팔레스타인의 유엔 정회원국 가입 역시 미국의 거부권에 의해 막혔다. 15년 가까이 북한을 감시하는 역할을 해 온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은 임기 연장안에 대한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종료됐다.
◇보호무역주의에 흔들리는 경제기구들 = 지난 4월 말 미국은 WTO 내 분쟁의 최종 중재자인 상소기구 위원회의 공석을 채우려는 데 대해 75번 연속으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때인 2019년부터 5년째 이 위원회는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각국이 자국 산업에는 보조금을, 다른 나라 산업에는 고율의 관세와 제재를 더하는 방식으로 ‘국제 규칙에 기초한 질서’를 해체하려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냉전 종식 후 각국은 경제가 통합해 성장하는 게 더 낫다고 보고, 많은 자본 통제를 폐지했다”며 “1995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의 WTO로의 진화에 수반된 개혁 중 하나는 무역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구속력 있는 구조의 창조인데 미국이 이를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난한 국가들의 부채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맡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위상도 축소되고 있다. 중국이나 인도 등이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채권자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 아프리카 일부 국가 등은 부채 상환 대신 진행할 구조조정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다. 이코노미스트는 “세계화의 황금기는 세계 빈곤의 전례 없는 감소로 이어졌다. 세계화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건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거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며 “속도를 내는 탈세계화의 진정한 비용은 곧 분명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민병기 기자 mingm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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