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한장] 음란과 외설로 찍힌 화가 에곤 실레가 사랑한 풍경... 체스키크룸로프
28세에 요절한 에곤 실레(1890~1918)는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와 더불어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짧은 생에도 불구하고 3000여점의 드로잉과 300여점의 그림을 남겼다.
우리에게 익숙한 에곤 실레의 이미지들은 지극히 감정적이거나 과장된 인체의 변형을 통해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인체의 형상을 거부한 적나라한 누드가 많다. 자화상도 많이 그렸다.
자위하는 자화상이나 옷을 걸친 것 같으면서도 여성의 성기를 도드라지게 표현한 그림들은 관람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성적인 욕망, 원초적 본능을 주저 없이 표현해 20세기 초 외설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림에 등장하는 모델들은 하나같이 길쭉하거나 각지거나 꼬여있다. 앙상한 갈비뼈며 뒤틀린 팔 다리, 초점을 잃은 시선으로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려 했다고 한다.
클림트와 실레의 그림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상궁) 미술관이나 레오폴트 미술관을 둘러보고 나오면 클림트의 ‘키스’, ‘삶과 죽음’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에곤 실레의 거친 숨결만 기억에 남을 정도다.
1890년 오스트리아 빈 서쪽 외곽의 작은 마을 툴른에서 태어난 에곤 실레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고향이었던 크루마우(체스키크룸로프의 옛 이름)를 종종 방문했다. 1911년 봄에는 그의 모델이자 연인이며 헌신적 동반자였던 열 일곱살의 발리 노이칠과 체스키크룸로프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레는 이곳에서 어린 소녀들을 모델로 누드를 그린다는 소문으로 3개월 만에 쫓겨나듯이 마을을 떠나야 했다. 젊은 화가와 모델 발리의 자유분방한 생활을 ‘죄악 속에 사는 것’으로 여기는 마을 주민들로부터 환영 받지 못한 것이다.
1912년, 빈 서쪽의 작은 마을 노이렌바흐에서 작업실을 열었을 때 실레는 미성년 소녀를 유혹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경찰은 그의 작업실에서 수 백 장의 누드 그림을 몰수한 뒤 21일 간 구금했다. 재판에서 미성년 유혹과 유괴 혐의는 벗었지만 미성년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외설적인 그림을 전시했다는 이유로 3일간 투옥된 뒤 석방됐다. 재판정에서 그의 선정적 그림 한 점이 불태워지기도 했다.
에곤 실레는 후에 자신의 작품이 계속 외설 논란에 휩싸이자 “아무리 에로틱한 작품도 그것이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는 이상 외설은 아니다. 그것은 외설적인 감상자들에 의해 비로소 외설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 후에도 에곤 실레는 스페인 독감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1918년까지 짧은 일정으로 체스키크룸로프를 찾아와 풍경화를 그렸다. 에곤 실레는 체스키크룸로프의 고풍스런 골목길과 붉은 색의 지붕, 검은 색의 블타바강, 보헤미아의 불타는 가을 숲이 어우러진 마을 풍경들을 즐겨 그렸다. ‘몰다우 강변의 크루마우의 풍경’, ‘빨래가 널린 집들’ 등 그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화들이 체스키크룸로프를 배경으로 그려졌다.
에곤 실레 초기의 풍경화들은 신체와 자연을 동일시하며 자연스런 풍경보다는 누드에서 보여지는 가을과 겨울의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자주 등장한다. 실레의 감정이 이입된 우울과 고독과 고립의 상징처럼 메마르고 여백이 많은, 거친 느낌의 풍경화다. 그러나 체스키크룸로프를 배경으로 하는 풍경화들은 서로 기대듯 붙어있는 건물과 지붕, 굽이진 길, 강변 마을 풍경이 따스하고 정감있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풍경화에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도 없고 쓸쓸함이 묻어나오곤 한다.
체스키크룸로프에는 오래된 아름다운 성과 성당이 있지만 에곤 실레의 풍경화에서는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에곤 쉴레의 대표적 풍경화 ‘빨래가 널린 집들(1917)’을 에곤 실레의 시선에서 바라봤다. 빼곡한 집과 창문과 지붕 위로 성당의 첨탑이 보였지만 에곤 쉴레는 성당의 첨탑을 과감하게 생략해 버렸다. 권위와 전통적 질서에 대한 반항일까? 그림 속의 집들은 이제 펜션이나 까페, 음식점으로 변했을지라도 100년 전 실레가 그림에 담고 싶었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에곤 실레는 이 작은 마을을 무척 사랑했다. 친구에서 보낸 편지에서도 체스키크룸로프에 대해 이렇게 썼다. “보헤미아의 숲으로 가고 싶다. 그곳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찬찬히 바라보며, 어둑한 곳에서 입에 물을 머금고 하늘이 내려준 천연의 공기를 마시며 이끼 낀 나무를 바라본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어린 자작나무 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볕을 쬐며, 푸른빛과 초록빛에 물든 계곡의 차분한 오후를 즐기고 싶다.”고.
체스키는 ‘보헤미안’의 뜻이고 크룸로프는 ‘구불구불한 강 옆의 풀밭’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사회의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방랑자,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예술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집시’의 의미가 보헤미안에 담겼다.
체스키크룸로프는 20세기 중반 국가(체코)에 귀속되기 전까지 지방 귀족의 사유지였다. 13세기 중반 남보헤미아를 통치했던 비트코비치 가문이 처음 크롬로프 성을 지었고 14세기 중반부터 로즘베르크 가문이 통치하며 은광을 통해 경제적 부를 쌓으며 성을 재건축했다.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자연 지형을 따라 아기자기하게 체스키크룸로프를 채우고 있다.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 18세기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체스키크룸로프를 휘감고 도는 블타바(Vltava)강은 보헤미아의 고산지대에서 발원해 프라하를 거쳐 프라하 북쪽에서 엘베강과 합친다. 폭이 넓지 않은 그 물줄기를 따라 체스키크룸로프는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다. 강물은 생각보다 탁하고 검은색이다. 강바닥의 돌들이 검은색이어서 검은 강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주변의 토양이 검은 색이어서 강물도 검다는 이야기도 있다. 상류라서 오염된 강물은 아니었다. 제법 낙차가 있는 강물 위에서 카약을 타거나 래프팅을 하는 관광객들도 많았다.
체스키크룸로프 여행객들은 대부분 프라하에서 당일 여행을 하거나 프라하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이동 중에 잠시 들러서 로즘베르크 성과 오래된 체스키의 골몰길을 둘러보고 떠난다. 여행객들이 떠난 뒤 어둠이 깔린 로즘베르크 성에 오르고 블타바 강줄기를 따라 걸으며 에곤 실레가 방황했던 흔적을 따라갈 수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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