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주의 극본에 현대적 연출로 되살아난 차범석의 '활화산'

오보람 2024. 5. 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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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주년 기념작…양돈사업으로 집안 일으키는 며느리 이야기
1974년 새마을운동 독려 목적으로 초연…구습·정치 비판도 담아
연극 '활화산' 공연 장면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니가 뭘 안다꼬 남자 하는 일에 참견이가 말이다." (남편 상석), "며느리를 데려온 게 아니라 상놈의 집안에서 상것을 데려다 밥을 먹였구나!" (시어머니 심씨)

이씨 문중 종가에 시집온 정숙에게 식구들의 말 화살이 쏟아진다. 지금이라면 이혼 사유로 거론될 법하지만 때는 1960년대 말, 경상북도의 한 벽촌. 정숙은 푸대접과 구박에도 어른들을 봉양하고 조카들을 돌보며 고된 시집살이를 하고 있다.

친정어머니는 이 참판 댁에 가면 밥은 굶고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으나 가세는 기울어진 지 오래다.

정숙의 마음을 더욱 답답하게 하는 건 끼니때마다 쌀 걱정을 하는 형편에도 '도리'를 고집하며 제사를 챙기는 시부모와 완장 욕심으로 갖은 선거에 출마하는 남편이다.

시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빚이 쌓여가자 보다 못한 정숙은 시어머니에게 경제권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한다. 믿고 맡겨주면 망해가는 집안을 어떻게든 살려보겠다는 것이다.

국립극단이 한국의 대표 극작가 차범석(1924∼2006)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이고 있는 연극 '활화산'은 정숙이 양돈 사업으로 집안을 일으키는 과정을 그린다.

언뜻 주체적이고 리더십을 갖춘 젊은 여성의 영웅담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작품은 박정희 전 대통령 정권의 새마을운동을 홍보·독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1974년 초연 당시 16개 도시를 순회 공연했고 녹화 영상이 방송으로도 나갔다.

연극 '활화산' 공연 장면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정숙의 통솔력 덕에 양반 가문의 옛 영광을 붙든 채 일하지 않던 이씨 식구들과 다른 누군가가 마을을 발전시켜주기를 바라며 손 놓고 있던 주민들은 점차 변하기 시작한다. 우리 힘으로 '잘살아 보세'라는 새마을운동 구호를 충실히 이행하는 셈이다.

특히 정숙의 입을 통해 이런 메시지는 단도직입적으로 전달된다. "우리 농촌 사람이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뭔가 해야 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같은 직접적인 대사는 프로파간다 예술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선전용 연극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작품 자체가 지닌 가치마저 깎아내리긴 어렵다. 당시 사회에서 분출된 구습에 대한 지적과 세대 갈등, 도농 격차 문제 등을 지금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윤한솔 연출은 각색을 전혀 하지 않고 차범석이 쓴 극본을 그대로 살려 무대에 올렸다. 사실주의 희곡의 대가가 쓴 극본답게 당시 격변하는 농촌의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한편 여러 사회 문제를 꼬집는다.

눈에 띄는 대목은 극 중 강상구 의원으로 대표되는 당대 정치인에 대한 비판이다.

강상구는 표심을 얻기 위해 마을에 다리를 내주겠다며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약을 펼치고 축산조합장 선거에 개입하기도 한다. 정권 사업 홍보를 위한 작품에 기성 정치 문화 비판이 담긴 것은 작가의 양심과 용기가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작품은 극 후반부 정숙이 독재자처럼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가 마을 사람을 모두 불러 놓고 연설하는 장면은 히틀러를 연상시킨다. 카리스마 넘치는 정숙과 그의 말에 홀려 주관 없이 "옳소"를 연발하는 모습은 소름이 돋게 한다.

연극 '활화산' 공연 장면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여기에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연출을 가미해 보는 재미를 준다.

작품의 주 무대인 이씨의 한옥은 제자리에서 이따금 빙빙 돌며 집 안 구석구석의 식구들을 보여준다. 이 노인이 죽은 다음에는 한옥을 와이어로 끌어올리고, 그 아래 집채만 한 영정 사진을 걸어둔다. 초대형 돼지 모형도 2부에서 관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연극과 실제를 넘나드는 장면을 보는 재미도 있다. 공연 도중 스태프들이 소품을 치우고 한옥에 와이어를 설치하는 모습을 관객에게 여과 없이 드러낸다. 1부 끝 무렵에는 심씨를 연기한 원로배우 백수련이 개인적인 소회를 밝히고 정진각은 구성진 트로트를 부른다.

희곡과 초연에서는 비중이 작던 정숙의 세 조카는 이번 공연에서는 '신 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한다. 대사가 없는 장면에서도 무대 한쪽에서 어른들 몰래 담배를 피우거나 장난을 치며 웃음을 유발한다. 내레이션도 아이 중 한 명인 길례가 담당한다.

'활화산' 공연은 다음 달 17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다.

정숙 역의 강민지, 상석 역의 구도균을 비롯해 이상은, 박소연, 강현우, 이주형, 박은경, 서예은, 장호인 등 18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rambo@yna.co.kr

연극 '활화산' 공연 장면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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