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2008년 루마니아 출장 회상
5월20일부터 6월9일까지는 프랑스 오픈테니스대회 시즌이다. 요즘 내 취미는 테니스고 허리와 무릎을 희생하며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테니스를 즐기고 있다. 테니스코트에서 외국계 회사의 한국 현지법인 대표, 주한 외국대사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자주 보는 분은 유럽에서 온 젊은 대사 한 분이다. 키는 190㎝의 거인이지만 늘 겸손하고 예의 바르며 일을 참 열심히 하는 분이다. 그리고 이 분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한국 기업들을 자국에 유치하는 것이다.
1953년 6·25전쟁 종전 후 71년 동안 한국은 그야말로 괄목할 경제성장을 이뤘다. 수출주도 성장과 과감한 해외투자는 한국 경제발전에 성공적인 전략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해외투자 사례들이 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 속 사진들을 정리하다 2008년 대우조선해양의 루마니아 망갈리아 조선소 출장 때 찍은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한 2008년은 정말 특별한 해다. 나는 KDB산업은행 뉴욕지점에서 3년간의 주재원 근무를 마치고 그 해 3월 초 서울로 돌아왔고 두 번째 M&A실 근무를 시작했다.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산업은행이 최대주주로 있던 대우조선해양의 매각작업이 시작됐고 나는 매각자문업무의 프로젝트매니저(Project Manager) 역할을 부여받아 월화수목금금금 하면서 한 해를 보냈다.
당시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관심이 있던 기업들 입장에서는 몇 가지 중요한 리스크 요인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루마니아 망갈리아 조선소의 납기지연으로 인한 손실문제였다. 그 해 8월 망갈리아 조선소 상황 파악을 위해 한영회계법인 분들과 루마니아로 출장을 갔다. 그 당시 내가 루마니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체조요정 나디아 코마네치, 그리고 1967년 권력을 잡아 1989년까지 철권 독재정치를 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 정도였다.
망갈리아 조선소는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4시간 정도 거리의 흑해 연안에 위치했다. 현지 직원들과 면담하는 과정에서 파악한 망갈리아 조선소 부실화의 주원인은 인력유출이었다. 유럽연합(EU)의 탄생으로 EU 국가간 취업장벽이 없어짐에 따라 현지 양질의 노동력들이 서유럽으로 떠나간 것이다. 경험과 기술을 가지고 있던 많은 루마니아 노동자가 서유럽 노동시장으로 떠남에 따라 심각한 인력부족 사태가 생겼고 이로 인해 수주해놓은 선박들의 수리 또는 신조 관련 납기를 못 맞춰 지연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 빠진 것이다. 조선업에서 세계 2, 3위를 다투는 글로벌 기업인 대우조선해양일지라도 EU의 설립이 망갈리아 조선소에 미치는 영향까지 예상하고 해외투자 의사결정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해외투자에선 투자 대상 국가의 정치 및 사회적인 변화가 투자의 성패를 좌우하는 변수가 되기도 한다.
현지 인사담당 부서장과 면담하면서 느낀 또 하나의 이슈는 현지 파견 한국 주재원들과 현지인 직원들 간의 커뮤니케이션 문제였다. 유엔이 발표한 2022년 말 루마니아의 1인당 GDP는 미화 1만5295달러로 국가순위 60위에 해당하고 한국의 2022년 말 1인당 GDP는 미화 3만2305달러로 국가순위 30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1인당 GDP가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루마니아는 과거 동로마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한 나라다. 경제적으로는 대한민국 등 신흥 경제강국들만 못하지만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런 국가에 투자를 하고 기업을 경영하려면 현지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 그런 노력이 없다면 한국 기업들의 세계화는 요원할 것이다.
2008년 여름, 실사를 마치고 흑해 바닷가 카페에서 맥주 한 잔을 한 것이 벌써 16년 전 일이 돼버렸다. 그 후 한국 기업들은 해외투자와 관련해 많은 경험과 지식을 축적했으리라. 세계 어디서나 우리 기업들이 상생의 정신으로 더욱 더 발전해나가길 기원한다. (반영은 인베스터유나이티드 대표)
반영은 인베스터유나이티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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