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비둘기와 닭둘기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2024. 5. 30.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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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이태희 연구관

며칠 전 출장길, 서울역 역사 안으로 비둘기 몇 마리가 날아들었다. 신기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아이도 있지만 대개는 예상치 못한 날갯짓에 깜짝 놀라 인상을 찌푸린다. 비둘기가 도심의 천덕꾸러기가 된 지는 이미 오래다. 2009년 유해조수로 지정된 이후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들과 또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심심치 않게 펼쳐진다. 불결한 모양새, 온전치 못한 다리로 음식물쓰레기를 주워 먹는 비둘기를 보면 멀리하고 싶은 마음 반, 측은한 마음 반이다.

요즘 처지와 달리 비둘기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평화, 사랑, 순결의 상징이었고 또 상당히 실용적이기도 했다. 먼저 집을 잘 찾아오는 습성 탓에 일찍부터 통신수단이 됐다. 고대 페르시아의 선원들은 배에서 비둘기를 길러 항해 도중 집에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이런 비둘기를 편지를 전하는 비둘기라 해 '전서구'(傳書鳩)라고 부른다. 무선통신기술이 보편화하기 전까지 비둘기는 조난선박의 구조신호, 전장의 무전기로 맹활약했다.

미국 워싱턴DC의 스미스소니언미국사박물관엔 '세어 아미'(Cher Ami)란 이름의 외다리 비둘기 박제가 있다. 세어 아미는 제1차 세계대전 미군 소속으로 참전한 비둘기다. 당시 그의 부대는 독일군에게 둘러싸여 아군의 포탄세례까지 받았다. 세어 아미는 부대의 현재 위치와 포격을 중지해달라는 메시지를 달고 포병부대로 향했다.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으나 도중에 입은 상처로 다리 하나를 절단해야 했다. 프랑스 정부는 그 공로를 인정해 훈장을 수여했다. 세어 아미는 열렬한 환영 속에 미국으로 돌아가 한 해를 더 살다 죽었다. 육군은 세어 아미의 사체를 박물관에 기증했고 박물관은 박제해 미국 역사의 한 부분으로 남겼다.

비둘기는 애완용 조류 중 하나였다. 어떤 사람들은 비둘기를 좋아해 여러 종류를 모으고 새로운 품종을 찾아다녔다. 날씨가 차면 감초가루를 줘 추위를 다스리게 하고 더우면 소금을 먹여 갈증을 풀어줬다. 고려시대 장수 최충수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모양이다. 그는 권력자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에게 비둘기를 빼앗기고 분에 차 형 최충헌과 반란을 일으켜 이의민 일당을 모두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최씨 무신정권의 시작엔 비둘기가 있었다.

일제히 비상하는 비둘기는 체육행사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은 그 오랜 전통의 일부였다. 1982년 제63회 전국체전을 앞두고 경상남도는 고민에 빠졌다. 개막식 때 일시에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행사를 해야 하는데 도통 비둘기를 구할 수 없었다. 서울시로부터 비둘기를 빌려올까도 생각했으나 혹여 날려보낸 비둘기가 모두 제집으로 돌아가면 어쩌나 걱정하다 결국 포기하고 특단의 조처를 내렸다. "비둘기를 생포하라." 경상남도는 전 소속 시군에 비둘기를 잡아 보내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에 시군의 공무원과 학생들은 이 산 저 산을 돌며 비둘기를 잡아들였고 마침내 1000마리의 비둘기를 모을 수 있었다. 비둘기들은 '기록보다 질서'를 강조한 그해 전국체전의 개막을 전국에 알렸다.

사람들이 버린 음식물에 몸이 비대해진 비둘기를 흔히 '닭둘기'라고 부른다. 옛날 기록에선 '비닭이'라는 표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비둘기의 어원은 '빛'과 '닭'에 호칭어미 '이'가 붙은 것이라 한다. 다시 닭이 되었건만 빛은 잃었다.

환경부 통계에 따르면 비둘기는 2018년 5만마리에 근접했으나 2021년 3만마리 미만으로 줄었다가 2022년 이후 다시 증가 추세라고 한다. 비둘기로 인한 피해와 이에 따른 민원도 여기에 비례해 늘고 있다. 이런 인식을 고려한 듯 최근 한 지자체가 지역의 상징이던 비둘기를 다른 새로 교체했다고 한다. '비둘기부대'나 '비둘기호' 같은 이름이 더는 나오지 않을 듯하다. 시인의 말처럼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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