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대통령 초상화는 어진(御眞)이 아니다
품위 지켜도 비판적일 수 있어
정치적 평가·논란까지 담아서
지도자의 성찰 계기 삼았으면
반쯤 완성된 자신의 새 초상화를 처음 봤을 때, 화가에 따르면 영국 찰스 3세는 “강렬한 컬러에 살짝 놀랐다”고 한다. 만족스러운 미소도 보였다지만 즉위 이후 처음으로 그린 공식 초상화가 온통 타오르는 붉은색으로 넘실댔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달 중순 공개된 그림은 실제로 강렬하다. 국왕의 제복도 바탕도 붉은색이어서 선홍빛 바다에 얼굴만 떠 있는 듯 보인다. 어깨의 나비는 왕자에서 군주로 거듭나는 탈바꿈의 과정, 자연에 대한 그의 애호를 중의적으로 상징한다. 이제 국왕은 환경과 관련된 행보에 나설 때마다 작은 나비를 떠올릴 것이다.
국왕의 초상화엔 권위와 위엄만이 넘칠 줄 알았는데 BBC는 그것이 ‘옛날 초상화’의 특징이라고 했다. 현대의 초상화라면 현대 미술이 대개 그렇듯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는 쪽이 자연스럽다. 영국 왕족의 초상화 중엔 옛날 같으면 불경죄를 면하기 어려웠을 것들도 있다. 1998년 완성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초상화는 샛노란 바탕색이 목을 가로질러서 머리와 상체가 분리된 듯 보인다. 당시 27세였던 작가는 “오늘날의 군주제에 필요한 펑키함을 묘사했다”고 했지만 “여왕을 참수했다”는 비판도 거셌다. 여왕의 남편 필립 공은 2003년 공개된 초상화에서 상의를 벗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됐다.
영국이 유별난 걸까. 2018년 공개된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초상화는 꽃과 나뭇잎이 배경에 가득하다. 아프리카 백합, 재스민, 국화는 각각 케냐(혈통), 하와이(출생지), 시카고(정치 기반)를 의미한다. 개인이 걸어온 길이자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역사의 행로다. 품위를 지키면서도 호의적이지만은 않을 때도 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2005년 초상화는 인물 옆에 누구의 것인지 분명치 않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작가는 푸른 드레스를 입힌 마네킹의 그림자를 묘사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의 체액이 묻은 푸른 드레스를 증거로 제출했던 르윈스키 스캔들의 그림자가 말 그대로 화면에 어른거린다.
모든 초상화가 이런 식은 아니지만 어떤 초상화는 이렇게도 그려진다. 그리고 대중 앞에 널리 공개된다. 찰스 3세의 새 초상화는 다음 달 14일까지 런던 필립 몰드 갤러리에, 이후엔 금융 지구 시티오브런던의 드레이퍼스 홀에 전시된다. 워싱턴 DC 도심의 국립 초상화 갤러리에는 역대 대통령을 조명하는 상설 전시실이 따로 있다. 클린턴 초상화에 달린 설명에는 “두 번째 임기는 백악관 인턴과의 성적 접촉에 대한 위증을 비롯한 스캔들로 얼룩졌다”는 내용도 들어있다고 한다.
우리 대통령들의 초상화는 어떤가 싶어서 검색해 보니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기사가 나왔다. 문재인 정부 시절 박물관에서 ‘역대 대통령’ 코너에 박근혜 전 대통령 초상화를 걸지 않다가 아예 코너를 없애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그림은 화제가 되지 않는다. 그림을 도구화하는 편협이 논란이 될 뿐이다.
청와대 세종실에도 역대 대통령들 초상화가 걸려 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공간이 개방돼 누구나 그림을 보게 됐으니 반가운 일이다. 다만 그림의 배경도 구도도 비슷비슷한 점은 아쉽다. 회화적 표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대담한 상상은 찾기 어렵다.
우리도 더 자유롭게 그리고 더 널리 전시하면 어떨까. ‘인(人)의 장막’에 둘러싸인 지도자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작은 계기는 되지 않을까.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 ‘셀카’의 시대에 지도자의 초상화를 그리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이유가 “이 화상[像]이 아니면 후손들이 무엇에 의거하여 선왕의 얼굴을 뵙겠는가”(세종실록)라고 했던 조선 시대처럼 대통령의 이목구비 생김새를 후세에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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