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의동 칼럼]‘침 뱉기’ 말고 할 줄 아는 게 뭔가

서의동 기자 2024. 5. 2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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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전 대통령이 최근 펴낸 회고록에는 2018년 9월 평양공동선언에 담기지 않은 구두 합의가 나온다. 당시 남북 정상은 공동성명에 담긴 ‘영변 핵시설 폐기’를 북한과 미국의 전문가·기술자들이 공동 작업으로 하는 방안에 뜻을 모았다고 한다. 이는 이듬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직후 리용호 북한 외무상의 기자회견에서도 확인된다. 미국 전문가들은 북한 영변의 핵활동 이력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따라서 다른 쪽으로 분산돼 있을지 모를 핵물질이나 핵무기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북한 핵의 전모를 미국이 들여다볼 기회이니 투명성 면에서도 ‘핵 리스트’ 제출에 버금가는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내 북한 핵 최고 전문가인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전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장)는 2007년 8월 영변 방사화학실험실(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시설)을 방문한 뒤 이 시설들을 불능화하는 데 최소 1년, 많게는 4~5년이 걸리고 완전 폐기 및 해체·정화 작업까지 포함하면 10년 이상 걸릴 것으로 추정했다(<핵의 변곡점>). 장기간이 소요되고 기술적 난도도 높은 핵폐기 작업을 북·미가 함께하는 것은 양측 간 신뢰 형성에 다시 없을 기회다. 전문가, 기술자, 외교관, 통역과 지원인력 등 450~500명의 미국 인력이 길게는 10년간 평양과 영변에 상주하게 되면, 미국 연락사무소도 생길 것이다.

국내외 보수세력들의 ‘빈 깡통’ ‘고철’ 평가와 달리, 영변 핵시설은 여의도의 3배에 달하는 부지에 300동의 건물과 시설이 들어선 북한 핵의 심장부다. 2004년 이후 영변 핵시설을 수차례 방문한 헤커 박사는 영변이 북한 핵능력의 80%를 차지한다고 평가한다. 특히 플루토늄과 삼중수소 생산시설은 영변에만 있어 이곳이 폐쇄되면 소형 핵탄두와 수소폭탄을 만들 수 없다. 이에 더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8년 9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핵무기연구소’ 중단 방침을 밝힌 친서를 보냈다. 북한 핵의 두뇌 격인 연구소 폐쇄는 ‘핵 프로그램의 궁극적 종식’(헤커 박사)을 뜻하는 것이었다.

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딸 세대한테까지 핵을 머리에 이고 살게 할 수는 없다”는 김 위원장의 말을 옮겼지만, 그가 ‘어느 시점까지 어떤 형태로’의 비핵화를 구상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확실한 건 북한의 제안이 핵능력의 획기적인 감축이었고, 북·미가 핵폐기 공동 작업을 통해 신뢰를 구축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비핵화와 상응 조치를 단계적·동시 행동적으로 이행하자는 북한 구상은 판타지같은 ‘단박에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불가역적 비핵화)’보다 설득력이 크다. 적어도 이 시기의 김정은과 북미 협상 결렬 이후의 김정은은 구분해 봐야 한다.

하노이 결렬 뒤 5년, 조 바이든 정부 임기 마지막 해에 와서야 미국에서 ‘단계적 비핵화’가 거론되고 있는 것은 만시지탄이다. 미국 백악관 관리들이 언급하고 있는 ‘북한 비핵화를 위한 중간 단계(interim steps)’는 2018년 남북 정상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비핵화 프로세스와 기본 구조가 같다. 윤석열 정부 국가안보실장이 ‘미국 정부 내에서 그런 논의는 없다’고 공개 부인했지만, 백악관은 곧바로 ‘중간 단계’를 검토하고 있다며 반박했다(미국의소리(VOA) 5월1일자). 국내 보수들이 맹비난해온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방법론을 미국이 따라가려는 것은 그만큼 현실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5년 전 그대로 되돌아가기는 힘들 것이다. 북한 핵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만큼,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아야 한다. 하노이 당시 북한은 민수·민생에 장애가 되는 대북 제재 해제만을 요구했지만, 지금은 더 비싼 대가를 원할 것이다. 한·중·일 정상회의가 ‘한반도 비핵화’를 합의하지 못할 만큼 국제 환경도 악화됐다. 차기 미국 정부가 대북 접근에 나설지도 불투명하다. 다만, 생존에는 핵으로 족하겠지만 번영을 위해서는 외교를 할 수밖에 없는 북한이 다시 대담한 선택을 할 가능성은 열어둘 필요가 있다.

회고록을 두고 여당 의원들은 ‘문재인=김정은 대변인’이라고 비아냥댔고,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북한의 의도를 전적으로 믿는다면 부정적인 안보상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대북 외교의 ‘의도도 능력도’ 지금 정부에선 보이지 않는다는 점 아닌가. 전쟁위기를 반전시켜 ‘일을 만들어 보려던’ 분투 기록에 침이나 뱉고, ‘김건희 방탄’에 동원하는 여권 인사들을 보니 우리 운명을 우리가 결정하지 못하게 될 사태가 또 벌어질까 걱정된다.

서의동 논설실장

서의동 논설실장 phil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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