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변가 윤석열의 선택적 침묵 [뉴스룸에서]
황준범 | 정치부장
채 상병 특검법을 여당이 ‘단일대오’로 저지했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잠시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지난 28일 특검법이 국회에서 부결되고 몇시간 만에, 윤 대통령과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지난해 여름 통화 내역이 공개돼 수사 외압 의혹은 더 커지고 있다.
윤 대통령은 8월2일 휴대전화로 이종섭 당시 장관에게 낮 12시7분, 12시43분, 12시57분 세차례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이 국방부 장관과 수시로 통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날은 오전에 임성근 사단장을 채 상병 사망 사건 혐의자로 포함한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가 경찰로 이첩된 날이다. 윤 대통령과 이 전 장관이 통화하는 사이에 박정훈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은 보직 해임 통보를 받았고, 그날 저녁에는 국방부 검찰단이 경찰로부터 사건을 회수했다. 임성근 사단장을 혐의자로 포함한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에 격노했다고 알려진 윤 대통령이 이 전 장관과 그날 긴박하게 어떤 내용의 통화를 한 것인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야당은 “수사 외압 의혹의 스모킹건”이라며 윤 대통령 수사를 주장한다.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의 핵심은 결국 한곳을 가리키는데, 그곳에서는 명쾌한 얘기가 나오지 않고 있다. 지난해 여름 이후 10개월째 막대한 정치적, 사회적 국가 에너지가 이 사안에 들어가고 있다. 192석으로 덩치가 더 커진 야권은 22대 국회에서 특검법 재추진을 벼리고 있다. 이 사안을 두고 여권은 ‘사망 사건에 군은 수사권이 없으니 수사 외압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최근에는 ‘대통령이 격노한 게 죄냐’며 본질을 흐리는 논리를 편다. ‘브이아이피(VIP) 격노’가 중요한 것은 격노 자체가 문제라는 게 아니라, 그 격노로 인해 이첩 사건 회수와 혐의자(임성근 사단장) 배제 등 수사 방향이 바뀐 정황들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특검법을 막으려고 대통령실과 법무부, 여당은 ‘삼권분립에 어긋난다’는 등 취약한 논리로 방어를 시도했다. 황우여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특검법 표결에 앞서 당 소속 의원들에게 한 “어려울 때 친구가 친구다. 우리 당이 어렵고 대통령이 어렵고 나라가 어렵다”는 말이 차라리 솔직하다.
이 사안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윤 대통령이 역정을 냈다는 지난해 7월31일 회의에 국가안보실장, 관련 수석급, 비서관들이 참석했고, 이후 박정훈 대령 보직 해임과 이첩 사건 회수 과정에 대통령실, 국방부, 해병대, 경찰 등에서 수많은 이들이 관여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건의 조각들이 더 나올 테고, 수많은 사람들이 말 못 하며 속이 타들어간다.
망가지는 것은 여당도 마찬가지다. 특검법 부결을 국회 현장에서 지켜본 예비역 해병대원들은 국민의힘을 향해 “너희가 보수냐”고 절규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안보를 누구보다 강조해온 보수 정당은 채 상병 사망 및 수사 외압 의혹 앞에서는 유독 냉철한 ‘법리’로 방어막을 치기 바쁘다. 국민 눈에는 ‘헌법 수호’가 아니라 ‘대통령 보호’로 비친다. 국민의힘 당대표 출신인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그렇게 갈취당하고, 얻어맞으면서도 엄석대의 질서 속에서 살겠다고 선언한 학생들”이라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빗대 꼬집었다.
윤 대통령은 지난 9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 때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도 있었다. 기자가 ‘대통령실 외압 의혹과 대통령께서 국방부 수사 결과에 질책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물었는데, 윤 대통령은 “(주검 수습 작업을) 왜 이렇게 무리하게 진행해서 인명사고가 나게 하느냐고 국방장관에게 질책성 당부를 한 바 있다”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다변가로 이름난 윤 대통령은 이 사안에 대해 시원하게 말하지 않고 있다. 의혹 증폭, 혼란 가중을 막으려면 윤 대통령이 직접 국민 앞에 나서야 한다. 격노설의 실체는 뭐였고, 이종섭 전 장관과는 어떤 대화를 했으며, 항명 혐의로 기소된 박정훈 대령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등을 소상하게 밝혀야 한다. 오해를 바로잡을 게 있다면 바로잡고, 국민에게 양해 구하고 사과할 게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수사받을 게 있다면 적극 응하겠다는 뜻도 밝혀야 한다. 특검법을 막아준 여당의 단일대오에도 한계라는 게 있다.
jay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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