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일제시대 화전민, 땀과 恨과 눈물의 인생살이

2024. 5. 29.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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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민이란 불을 놓아 야초(野草)와 잡목을 태워버린 뒤 그 자리를 일구어 농사를 짓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는 요사이 소작인의 불쌍한 상태를 동정하며 말하지마는 그 소작인보다도 몇 곱절이나 비참한 화전민의 정황을 소개하면, 춘궁(春窮)을 당하여 보통 농민도 주린 배를 움켜쥐는 일이 드물지 않거늘 심산궁곡(深山窮谷)에서 나뭇가지 풀잎 사이로 풍우(風雨)를 피하며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해 가는 수만의 화전민의 비참한 정황이야 무엇이라 할 수 있으랴. 조선 전도의 화전민이 얼마인지 자세한 숫자는 모르나 최근 총독부 조사에 나타난 숫자만 보더라도 호수 15,000호에 인구 70,000여 명이다. 화전민이 제일 많은 도(道)는 평안북도의 6,000호에 28,000여 명이요 그 다음이 평안남도 3,109호의 13,000여 명이며, 제일 적은 도가 충청남도로서 거의 없다 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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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소작인보다 몇 곱절 더 비참했던 생활 호구지책도 못하는데 호랑이피해까지 독립군 잡겠다며 삶의 터전 없애기도 지금은 그 때보다 얼마나 달라졌을까

화전민이란 불을 놓아 야초(野草)와 잡목을 태워버린 뒤 그 자리를 일구어 농사를 짓는 사람을 말한다. 화전 농업은 산간 지대나 고원에서 거의 비료를 주지 않고 경작하는 원시적인 약탈경제의 한 형태다. 화전민들은 수탈과 학정을 피해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었다. 구한말 동학 농민전쟁이 진압되면서 패배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대거 입산해 화전을 일궜다. 그 후 수가 계속 늘어 일제강점기 화전민 수는 50만명으로 추산된다. 100년 전 이 땅의 화전민 모습을 한번 살펴본다.

1924년 5월 3일자 동아일보에 '소작인보다 더 비참한 그 생활, 세상에서 숨어있는 가련한 일, 10여 만의 화전민(火田民)'이란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띈다. "우리는 요사이 소작인의 불쌍한 상태를 동정하며 말하지마는 그 소작인보다도 몇 곱절이나 비참한 화전민의 정황을 소개하면, 춘궁(春窮)을 당하여 보통 농민도 주린 배를 움켜쥐는 일이 드물지 않거늘 심산궁곡(深山窮谷)에서 나뭇가지 풀잎 사이로 풍우(風雨)를 피하며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해 가는 수만의 화전민의 비참한 정황이야 무엇이라 할 수 있으랴. 조선 전도의 화전민이 얼마인지 자세한 숫자는 모르나 최근 총독부 조사에 나타난 숫자만 보더라도 호수 15,000호에 인구 70,000여 명이다. 화전민이 제일 많은 도(道)는 평안북도의 6,000호에 28,000여 명이요 그 다음이 평안남도 3,109호의 13,000여 명이며, 제일 적은 도가 충청남도로서 거의 없다 해도 좋겠다."

불쌍한 화전민에 대한 기사는 이어진다. "늦은 가을에 산에 불을 질러 두었다가 이듬해 봄부터 귀밀, 조, 기장의 농사를 시작하는데 거름을 주는 것도 아니고 김을 매는 것도 아니니, 수확은 보통 밭의 10분의 1인 1정보에서 2석(石)에 지나지 못하며 먹고 남은 곡식을 시장으로 가지고 가서 소금과 바꾸어 옴에 지나지 못하며, 두어 마리의 돼지와 닭 몇 마리를 쳐서 옷감이나 사 오는데 지나지 못 하는데, 이것도 눈이나 많이 오는 겨울이 되면 먹일 것이 없어서 잡아 먹고 만다고 하니, 평생 가야 변변한 옷 한 벌 입어보지 못하며 불행히 농사나 잘 되지 않으면 할 수 없이 풀뿌리를 캐어 겨우 연명이나 해 간다 함에, 그들의 참혹한 사정을 무엇이라 하랴."

1924년 4월 7일자 매일신보는 화전민의 비참한 참상을 전한다. "평안남도 영원군 일대에서 화전민 5,300여 명은 1922년 1923년 2년에 곡식이 잘 되지 아니 하여 작년 올해 이래로 전혀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러 그 형상이 극히 참혹하므로 (중략) 그곳 주민들은 보통으로 감자나 좁쌀이나 혹은 피 등속으로 죽을 쑤어 하루에 한 끼나 혹은 두 끼를 간신히 요기하여 겨우 기아를 면해 가며, 그중에도 극히 빈한한 자는 산골짜기로 돌아다니며 도라지와 칡뿌리를 캐어 먹고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형편인데...(후략)"

화전민이 많은 곳은 산림이 울창한 곳이라 그들이 사는 곳에는 당연히 짐승, 특히 호랑이에 의한 피해가 많았다. 그중 하나를 살펴본다. "경남 거창군 고제면 봉산리에서는 대낮에 호랑이가 출몰하여 아이를 잡아먹었다는, 듣기에도 엄청난 비극적 사실이 있었다는 바 (중략) 교통이 불편한 고제면은 거창군에서도 더욱 가난한 면(面)인 만치 전군(全郡)을 통하여 6할 이상의 화전민이 사는 곳이라는데, 이곳에 사는 변영수(卞永洙)라는 사람은 자기 처와 오직 하나 밖에 아니 되는 아들 길록(吉祿, 4) 등 세 식구가 화전을 하여 가는 터인 바, 지난 15일 오전 11시 두 내외는 어린 것을 혼자 집에 버려두고 일을 갔던 바, 불행이도 호랑이가 나와서 집 뒤 반석 위에서 놀던 길록을 무자비하게도 잡아먹었으므로 동네 사람들은 방금 큰 소동 중에 있다 하며 심히 우려를 마지않는 중이라 한다." (1931년 6월 27일자 동아일보)

화전민이 가장 많았던 평안도 지방은 만주와 접해있는 국경 지역이기 때문에 생각지도 않은 문제로 피해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국경을 넘어 들어오는 독립군 때문이었다. "평안남도 영원군 지방은 산이 높고 골이 깊으며 종래 화전민이 많기로 유명한 곳인데, 평안남도청에서는 어떤 이유 하에 1919년부터 그들을 몰아낼 작정으로 무척 애를 써 왔으나 그들은 갑자기 갈 곳이 없으므로 부모 처자를 이끌고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중략) 매양 독립단(獨立團)들이 그곳에 우거(寓居)하여 소동을 일으키는 일이 종종 있다고, 도 당국에서는 이 집들을 전부 헐어 없앨 계획으로 총경비 838원 70전을 총독부에 청구하여 내년부터 실행에 착수할 터이라는데, 많은 화전민의 정말 갈 곳은 어디이며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는지 참으로 난처한 일이라더라." (1923년 11월 23일자 동아일보)

이렇게 삶의 터전을 잃게 된 화전민들은 살 길을 찾아 결국 만주 등지로 떠나게 된다. "근래에 조선에서는 화전 경작에 대한 취체가 점점 엄중하여 강원도 방면에 거주하는 조선 사람들은 간도로 이주하는 자가 날로 증가하여 가는 형편인데, 화전 경작을 금지한 즉 농업도 뜻과 같이 경영할 수 없고 다른 방면으로도 적당한 직업이 없으니, 오히려 광활한 간도 방면으로 이주하는 것이 생활하기에 용이하여 부과금도 적은 관계로 부득이 간도로 이주하게 된다는데, 이제 모(某) 당국에서 조사한 바를 보건대 금년에 들어와서 3월 말일까지에 이주한 자가 이미 호수가 135호이며 인구가 665명의 다수 함에 이르렀는데, 금후에도 계속하여 이주할 형세이더라." (1924년 5월 22일자 매일신보)

며칠 전 전세사기 피해를 당한 30대 여성이 "잘 살고 싶었지만 이 나라에서 서민은 죽어야 하느냐"는 말을 남긴 채 스스로 생을 등졌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이생을 떠나야만 했던 이 여성에게서 100년 전 살기 위해 이 땅을 떠나야만 했던 화전민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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