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이탈 100일…정부 복귀 호소에도 "이대론 못 돌아가"
전공의들 "증원 백지화 없이는 못 돌아간다"…생활고에도 강경 입장
'동맹휴학' 맞물려 의료인력 수급 차질 우려…"한발씩 물러서 해결책 찾아야"
(서울=연합뉴스) 성서호 기자 = 인턴, 레지던트 등 전공의들이 일제히 사직하고 병원을 떠난 지 100일이 지났지만, 의사들과 정부 간 입장차는 도무지 좁혀지지 않고 있다.
정부는 전공의들에게 각종 지원책을 제시하며 우선 복귀해 대화하자는 입장이지만, 전공의들은 돌아올 조짐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전공의들의 이탈과 함께 의대생들의 동맹휴학까지 맞물리면서 향후 수년간 의사인력 수급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우려마저 나온다.
의료계 안팎에서는 의정 갈등이 이대로 이어지면 남는 것은 '파국'뿐이라며, 양측이 한발짝씩 물러서 대화와 타협을 이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의료공백' 100일 맞아…정부 "복귀해 의료개혁 같이 얘기하자"
29일 정부와 의료계 등에 따르면 이날은 전공의들이 정부의 의대 증원에 반발해 병원을 떠난 지 100일째를 맞는 날이다.
'빅5' 병원을 비롯한 전국 주요 병원의 전공의들은 지난 2월 20일부터 집단 사직서 제출과 함께 의료 현장을 떠났다.
정부는 사태 초기 미복귀 전공의에 대해 면허 정지 등 행정처분과 사법 절차에 착수하겠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2월 말까지 복귀 현황을 살핀 뒤 3월부터는 업무개시명령 위반 사실을 확인해 절차를 밟겠다고도 공언했다.
그러는 사이 대형병원들은 수술을 미루거나 병동을 통폐합하면서 전공의 부재에 대응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이 감내해야 했다.
3월 말 충북 보은군에서는 도랑에 빠진 33개월 아이가 병원을 돌다가 끝내 목숨을 잃는 등 환자들의 안타까운 사고들이 잇따랐다.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자 이들을 지도하던 의대 교수들도 사직서 제출과 휴진으로 정부 정책에 맞섰다.
전공의들이 꿈쩍하지 않자 정부는 총선을 앞두고 3월 말부터는 '유연한 처분'을 강조하며 모든 처분 절차를 일시 중지했다.
이후 윤석열 대통령과 전공의 대표 격인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이 면담하면서 의료 공백 사태가 매듭지어질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졌으나, 대화는 아무런 소득 없이 끝이 났다.
정부는 이후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필수의료 지원 강화, 2025학년도 의대 모집정원 자율화 등 '유화책'을 제시하며 전공의들에게 우선 복귀해 대화하자는 메시지를 보내왔으나, 전공의들은 요지부동인 모습이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환자와 동료 의료진, 그리고 본인의 미래를 위해 주저하지 말고 용기 내어 소속된 병원으로 돌아오시기를 바란다"며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불이익이 큰 집단행동을 멈추고, 의료개혁 논의에 참여해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 나갈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고 말했다.
전공의들, 생활고 겪으면서도 "증원 백지화 없이는 못 돌아간다"
전공의들이 처음 가운을 벗어 던진 이후로 계속해서 주장해온 것은 '증원 백지화'였다.
전공의들은 집단 이탈 시작일인 2월 20일에 의대 증원 및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 전면 백지화, 불가항력적 의료사고에 대한 법적부담 완화,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등 7대 사항을 정부에 요구했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정부가 의대 증원을 철회하지 않는 한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얘기다.
복지부와 각 지방자치단체가 집계한 결과, 이달 28일 기준 수련병원 211곳에서는 전공의 1만501명 중 864명만 출근(출근율 8.2%) 중이다.
전공의들은 본업인 의사로서 일을 포기한 뒤로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정부와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이달 2일부터 1인당 1회 100만원을 지급하는 긴급생계지원금 신청도 받고 있는데, 지난 21일 기준 전공의 1천646명이 생계지원금 지급을 신청했다.
수도권 한 병원의 전공의는 연합뉴스에 "소득이 끊겨서 생활이 어려우신 분들이 있다"며 "여기저기 조금씩 지원받는 중이라는데, 생활고가 복귀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는 것 같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2월에 저희가 사직서를 냈을 때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졌는데, 인제 와서 돌아갈 이유는 없다"며 "정부는 자기들 추진할 거 하면서 전공의들에게 돌아오라고 하는데, 어떤 바보가 돌아가겠나. 정부에서 먼저 지금 추진하는 것을 멈추는 게 중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사직 전공의는 "정부가 의료계와 맺은 2020년 9·4 의정 합의를 지키지 않는 게 문제"라며 "전문가인 의사들과 논의해야 한다는 약속을 잊은 채 일방적으로 증원을 확정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부가 전공의들에게 복귀를 종용할 것이 아니라, 사직을 허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9.4 의정 합의'는 코로나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의대 증원과 공공의대 신설 논의를 중단하며 이후 원점에서 재검토한다는 합의를 말한다.
의대생 '동맹휴학'까지…의료인력 장기적 '수급 차질' 우려
전공의 집단 이탈 사태가 석 달을 넘어 100일이 된 가운데 의대생들의 '집단 유급'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의대생들은 정부의 의대 증원에 맞서 집단으로 휴학계를 제출하고 넉 달째 수업을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집단 유급을 막고자 대학 측이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온라인 수업마저 거부하고 있다.
이들이 유급되면 매년 약 3천명씩 배출되던 신규 의사가 급감할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전공의들이 수련 기간을 못 채움에 따라 '전문의' 수급도 어려워질 수 있다.
관련 규정 등에 따르면 전공의 수련에 한 달 이상 공백이 발생할 경우 추가 수련을 받아야 한다.
이때 추가로 수련해야 하는 기간이 3개월을 초과하면 전문의 자격 취득 시기가 1년 지연된다. 수련 공백이 3개월을 넘기면 그해 수련을 수료하지 못하면 다음 해 초에 있는 전문의 시험에 응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내년 초 전문의 시험을 앞둔 전국의 3·4년 차 레지던트 총 2천910명이 이런 이유로 시험을 못 치면 그만큼 전문의가 배출되지 못한다.
전문의 배출이 밀리면 군의관이나 공중보건의사 배출도 어려워지고, 대학병원에 남아 세부 전공을 수련하는 '전임의' 배출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원래대로라면 전문의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한 전공의는 "이미 추가 수련기간 3개월이 지나버려 전문의 시험은 포기했다"며 "나와 비슷한 상황인 전공의들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전했다.
'예비 전공의'라고 할 수 있는 의대 본과 4학년의 대거 유급 가능성에 대해서는 "본과 4학년 학생들이 내년에 국시를 못 치러 인턴들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며 "병원에 인턴들이 없으면 전문의가 없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발짝씩 양보해야", "만나서 함께 풀어야"…대화 촉구 목소리
이처럼 전공의 집단 이탈과 미복귀 상황이 장기적으로 '파국'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이제라도 서로 양보하고 타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교수는 "이미 2025학년도 정원이 확정됐으니 정부가 앞으로의 정원에 관해서는 개방된 태도를 보이면 좋겠다"며 "전공의들도 이제는 정부와 대화하는 등 양쪽이 만나서 함께 풀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회정책국장은 "이제는 정말 장기전이 됐다. 의사들은 전면 백지화를 요구하며 여지를 주지 않고, 정부는 더 이상의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라며 장기전을 끝낼 '타협안'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정 갈등을 지켜보는 비(非)의료인 사이에서도 '휴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에 따르면 의대 증원 집행정지 요청 건을 다루는 대법원 재판부에 비의료계에서도 탄원서를 제출했다.
서울대 공과대학 성원용 명예교수는 탄원서에서 "대폭적이고 급격한 의대 정원 확대 때문에 한국산업의 경쟁력이 약해질 수 있고, 장기적으로도 공공복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의대 증원은 장기적 안목으로 추진해야 하고, 1년 정도 숙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탄원서에 참여한 컨설팅기업 '이노무브' 장효곤 대표도 "의대 증원이 맞는 정책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멈추고 충분히 논의해서 결정하는 것이 공공복리에 유리하다"고 제언했다.
so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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