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병원 수술대서 전공의 공백 메우는 중동 의사들
27일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수술실.
“Professor, how much is the size of the mesh?” (교수님, 막 크기는 어느정도가 적당할까요?)
“Defect size is not so big, so moderate size is enough.” (결손 부위가 크진 않으니 중간 크기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 병원 위장관외과 송교영 교수가 영어로 지시하자 1조수를 맡은 웨디안 모하메드 알하즈미 씨(37)의 손이 바빠졌다. 그가 복강경을 환자의 복부에 넣어 능숙하게 조종하자 이어 송 교수가 탈장이 생긴 환자의 복벽에 막을 붙였다. 알하즈미 씨가 환부를 봉합하면서 수술은 마무리됐다. 수술실에서 나온 알하즈미 씨는 “이번 탈장 수술은 쉬운 편이었으나 다음에 더 어려운 위암 수술이 예정돼 있다”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정부가 이달 8일 지금처럼 보건의료 단계가 ‘심각’ 단계인 경우에 한해 해외 의사면허 소지자의 국내 진료를 허용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실효성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환자들은 “외국 의사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는 입장이지만 의사단체에선 “국민 건강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가 이르면 다음 달 초부터 관련 시행규칙을 바꿔 해외 면허 소지자의 국내 진료를 허용할 방침인 가운데, 동아일보는 외국의사의 국내 활동 가능성을 점검하기 위해 현재 보건복지부 허가를 받고 국내 대형병원에서 수술과 진료를 돕는 중동 의사들을 만났다.
●“의료 공백 채워줘 고마울 따름”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인 알하즈미 씨는 지난해 9월 외과 전문의 자격으로 비뇨기과 전문의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왔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진흥원)에서 진행하는 ‘중동 의료인 연수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이다. 진흥원은 2013년부터 사우디 쿠웨이트 바레인 오만 등과 체결한 의사연구 시행협약에 따라 최대 2년 동안 수련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른바 ‘중동 펠로(전임의)’라고 불리는데 현재 대형병원에서 130여 명이 연수를 받고 있다. 알하즈미 씨의 남편도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해 서울성모병원 비뇨의학과에서 연수를 받고 있다.
현재 법적으로 해외 의사면허 소지자는 국내에서 원칙적으로 진료와 수술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외국과의 교육 또는 기술협력에 따른 교환교수 △교육연구 사업을 위한 업무 △국제의료봉사단의 의료봉사 업무 등은 보건복지부 허가를 받아 예외적으로 수술과 진료를 할 수 있다. 중동 펠로의 경우 이 중 두 번째인 ‘교육연구 사업’에 해당돼 환자 처치, 수술 보조, 드레싱, 차트 기록 등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다.
기자가 27일 방문한 서울성모병원 위장관외과에는 중동 펠로 3명이 연수를 받고 있다. 위장관외과는 전국적으로도 전임의가 15~20명에 불과할 정도로 만성적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과다.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 후 전공의(인턴, 레지던트) 2명도 병원을 떠났다. 송 교수는 “지금 같은 때 현장 업무를 도와주니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알하즈미 씨는 병동에서 회진도 돈다. 이 때는 번역기를 사용하며 환자들과 의사소통을 한다. 그는 “병동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환자들이 덕분에 치료를 잘 받았다고 말할 때 감동을 받는다”며 “교수님이 회진을 돌기 전 프리 라운딩을 돌면서 먼저 환자를 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환자 정모 씨(35)는 “외국분이 성심껏 돌봐주는 것 같아 감사하다”고 말했다. 알하즈미 씨는 “원래 1년 동안 한국에 있을 예정이었으나 1년 더 남아 복강경 수술 및 로봇 수술 분야를 더 익히고 싶다”고 했다.
28일 서울아산병원 이비인후과 외래 진료실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암마르 후세인 하비불라 씨(35)가 지도교수인 장용주 교수의 말을 경청하며 환자와 모니터를 번갈아 봤다. 하비불라 씨는 안면성형 재건 수술을 배우기 위해 올 2월 한국에 왔다. 장 교수는 “이번 사태로 전공의가 사라진 상황에서 중동 펠로 2명이 도와줘 수술을 진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병원에선 수술 동의서를 받을 때 중동 펠로가 수술 보조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을 환자들에게 알리는데 환자들도 큰 거부감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수술을 앞둔 환자 백모 씨(30)는 “의사가 없어 수술을 못하는 게 더 큰 문제 아닌가”라며 “수술실에 외국인 의사가 들어오는 것에 특별한 거부감은 없다”고 했다. 하비블라 씨는 “안면성형 분야에서 한국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고 장 교수는 세계적 명성을 갖고 있다”며 “내년 2월 연수를 마치면 사우디에 돌아가 환자들에게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다”고 말했다.
장 교수 밑에서 함께 수련을 받는 전임의는 “중동 펠로들이 자유롭게 질문하는 등 수술실 분위기가 좋다”면서도 “해외 의사들이 크게 늘면 한국 전공의나 전임의가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다소 줄어들 순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동 펠로들은 입국 후 한 달 가량 한국 의료법과 기초 한국어 교육을 받고 2, 3개월 동안 연수받을 의료기관에서 참관 연수를 한 후 환자 진료에 실전 투입된다. 29일 기준으로 5대 대형병원에서 일하는 중동 펠로는 총 86명이다. 서울대병원에는 비뇨의학과(5명)와 외과(1명)에서 연수를 받고 있다. 서울아산병원에는 이비인후과(5명)와 정형외과(5명), 산부인과(4명), 영상의학과(4명) 등에 총 27명이 연수를 받는 중이다. 삼성서울병원에는 위장관외과(4명), 간담췌외과(4명), 폐식도외과(3명), 대장항문외과(3명) 등에서 총 26명이 일하고 있다. 필수의료 분야라 전공의와 전문의가 부족한 분야가 많다.
●“의사 부족 해결” vs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전공의 이탈이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중동 펠로처럼 해외 연수생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의료 공백을 완화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전문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조승연 인천의료원장은 “외국어를 모국어로 활용하는 외국인 의사들이 있다는 건 굉장한 장점이기도 하다”며 “외국인들에게 일정 업무를 맡기면 전공의들의 노동 강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이사회장은 “우리나라의 의학 교육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외국에서 교육받은 의사들의 경우 환자들이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지도교수들은 중동 펠로들이 수술과 진료에 도움을 주긴 하지만 언어 장벽 때문에 전공의 공백을 완전히 채우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송 교수는 ”환자와의 의사소통에서 한국 의사들에 비해 어려움을 겪는다”며 “전공의 주 업무였던 오더를 내리는 업무까지 맡기진 못한다“고 말했다.
대면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보니 수술과 진료를 도울 순 있지만 외래진료를 하기도 어렵다.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정형선 교수는 “정부도 해외 의사 도입이 전공의 부재 상황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라면서 “다만 이런 비상 상황에서 가능성을 열어놓는 수준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박경민 기자 mean@donga.com
홍은심 헬스동아 기자 hongeuns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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