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위치 말해라” 수사실 강간까지··· 44년간 참회한 사람 한 명도 없다
5·18조사위 성폭력 사건 담당 윤경회 팀장
52건 의심 사례 중 16건 진상규명 성과 내
거부·자살·질환으로 조사 못한 사건 많아
“가해자 사과 이끌어내고 싶었지만 실패···
국가 대응 빨랐다면 피해자 삶 달라졌을 것”
지난해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바랐던 사람들 중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위원회) 윤경회 조사4과 3팀장도 있었다. 그는 5·18성폭력 사건 조사 책임자이다. 가해자가 유력한데도 거듭 부인하는 인물에게 다시 출석해 달라고 요구서를 보냈었다. “입원했다”고 거부하자 성탄절 전날 병원까지 찾아갔다.
“저희는 가해자를 특정하는 조사는 아니었고, 조사할 게 남은 것도 아니었지만, 한 사람이라도 참회를 하고 피해자에게 ‘진짜 너무 잘못했다’는 말을 끌어내고 싶었어요. 변명하는 자필 진술서만 또 쓰더라고요. 결국 ‘사과를 받아낼 수 있다’는 건 순진한 생각이었구나···(싶었어요).”
위원회가 내놓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사건’ 조사 결과 보고서에 담긴 끔찍한 사례들(그래픽 참조)을 보면, 단 한 명에게라도 그토록 사과를 끌어내고 싶었던 윤 팀장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그를 지난 21일 서울 중구 사무실에서 만나 소회를 들었다. 위원회는 지난해 말 4년의 조사활동을 마쳤고, 다음 달 26일 해단한다.
어렵게 입을 연 수사실 강간 피해자
위원회는 신청사건과 수사자료, 문헌, 보상심의 자료 등을 통해 성폭력 의혹 사례 52건을 모았고, 이 중 19건을 조사해 16건을 ‘진상규명’ 결정했다. 조사 거부, 사망, 자살, 정신질환 등으로 조사를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30대 여성 두 명과 함께 군용트럭에 납치됐다”는 조사 대상 피해자 진술 등을 볼 때, 아예 기록되거나 언급조차 되지 않은 성범죄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군법회의 자료를 찾은 결과, 당시 광주·전남 일원 군 성범죄(1980. 5. 17.~1981. 1. 24) 판결은 지역사단인 제31사단 방위병의 민간인 여성(평균 나이 15세: 20대 1건, 10대 6건) 강간 사건만 7건이 나왔다. 계엄군에 의한 성범죄 사건기록은 1건도 없었다.
특히 도심시위 진압작전 등에 비해 불법 연행·구금 피해자들의 조사 거부가 많았다. 그들은 “여성으로서 차마 말할 수 없는 피해를 겪었다”고 비슷한 표현들을 썼다. 결국 한 분을 설득해 “정식조사가 아닌 참고적인 진술로 해 달라”는 조건으로, 피해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수사실에서 이뤄진 강간이었던 거예요. 그런 일이 있을 법하다고 저희가 예상했지만 누구도 증언하지 않으면 담을 수 없는 것이었죠.”
위원회 보고서엔 이렇게 언급돼 있다. ‘사건 당시 수사관은 피해자에게 가족의 행방을 밝힐 것을 요구하며 수사실에서 강간했고, 피해자가 원하는 답변을 하지 않자, 옆에 있던 다른 수사관이 강간하겠다고 협박해 결국 그들이 원하는 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237페이지)’
윤 팀장은 “수사실 강간은 성고문이라 볼 수 있다”며 “합수단 소속 경찰일 수도 있고 군인일 수도 있다”고 했다. 결국 가족의 행방을 발설한 피해자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할 수 없었던 생애사적 비극을 겪었다.
“진압할 때 옷 벗겨라” 조직적 지시
위원회는 피해자 진술조사를 토대로 기록조사, 실지(현지)조사를 실시했으며, 군과 경찰 등에 대한 조사는 총 127회 실시했다. 광주 진압작전에 투입된 계엄군 조사를 통해 연행자 강제 탈의가 군의 조직적 지시로 이뤄진 것을 확인했다. “여자들은 옷을 벗기고 남자들은 팬티만 입혔는데 지역대장의 명령으로 이뤄졌다” “중대장이 ‘남자들은 진압봉으로 머리를 때리고 여자들은 웃통을 벗겨버려라’고 지시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윤 팀장은 “당시 옷이 벗겨진 상황이 모든 자료에서 확인되는데, 어떤 경위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저희 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붙잡은 연행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수치심을 느끼도록 해서 다시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자체로 ‘성적 모욕과 학대’이며, 이런 지시는 더한 성범죄의 자양분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한 군인은 “골목에서 넝마주이 여성을 상대로 강간하고 나온 상사가 더 이상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조사과정에서 ‘성고문’을 당했다는 남성 피해자 1명의 진술도 청취했다. 남성 성폭력 피해 규명은 미완의 과제로 남겨졌다.
가족에게도 지지받지 못하고···
윤 팀장은 “여성이 사회적 발언을 하는 데 억압이 굉장히 크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시어머니, 남편이 사망하셔서 이제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니, 마지막 관문으로 ‘아들과 며느리가 걸린다’는 거예요.”
1980년대는 성폭력 피해자를 정조를 잃은 여성으로 보는 시대였고, 이런 사회적 통념을 내면화한 피해자들은 자신이 겪은 일을 가족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거나, 털어놓아도 지지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다.
“여성으로 삶이 끝났다고 여겨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 구금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로부터 자식 취급을 받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 살아야 했음.”
“남편에게 상무대에서 겪은 성폭력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음. 처음엔 위로해준 남편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괴롭히는 날이 잦아졌고 그때마다 과거의 아픈 상처가 약점이 돼 남편의 부당한 언행 앞에서도 맞서지 못함. 친정어머니는 자녀의 불행한 부부생활을 보면서 결혼을 빨리 시켜버린 것에 자책하셨음.”
40년간 국가가 외면해온 당사자들의 마음을 이제 와서 열려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최대 7번 정도 저희가 접촉을 해서 거부하신 분도 있거든요. 이 조사를 통해 달라질 수 있을까에 대한 기대 반 걱정 반의 우려를 하셨어요. 아예 전화 한 번 받고 나서 전화번호를 차단하신 경우도 있어요.”
야당조차 외면했던 5·18 성폭력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1988~89)에서 고 전옥주씨가 성고문을 증언했지만, 성폭력 문제는 비중 있게 다뤄지지 못했다. 위원회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5·18부상자동지회 회장 이지현이 피해자를 대신해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자 자료까지 만들었으나, 야당 국회의원들의 만류(쟁점사안이 아니라거나 너무 끔찍해서 믿어줄 것 같지 않다)로 좌절된 바가 있다.’
윤 팀장은 “당시 국회 청문회는 특별법이 만들어져서 책임자를 처벌하는 게 관건이었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며 “그거에 비해서 이건(성폭력)은 사소하다, 또는 쟁점을 흐릴 수 있다, 시간이 얼마 없는데 이거에 집중하기에는 좀 버겁다, 국민들이 이걸 얼마나 믿어줄까 등의 이유로 증언대에 오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1986) 피해자에게 국회의원(김중위)이 “성고문을 두 시간씩이나 가해 오는데도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았다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고 피해자 탓을 했던 시대다.
윤 팀장도 너무 늦은 진상조사를 안타까워했다. “그런 얘기하시거든요. 젊은 시절에 그 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거나, 일을 중단하거나, 대인관계에서 위축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서둘러 결혼했다고요. 좀 더 빨리 증언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그것이 개인적으로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 걸 알았다면 꿈을 접지 않았을 테고···, 요즘 말하는 커리어우먼도 되고요. 그 모든 포기했던 선택들에 아쉬움이 아주 큰 거죠.”
피해자를 구한 건 다른 피해자
한번도 사회에서 치유과정을 거치지 못한 피해자들은 그 상태 그대로 얼어 버렸다. “이런 유의 사건은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면, ‘얼음’처럼 그냥 (피해가) 고정돼 있어요. 사건 당시 은장도로 자해할 만큼의 상황에 계신 분도 그 상태 그대로 오신 거예요. 여성주의적 상담을 받지 못하고, 남성 정신과 의사에게 ‘강간당한 사람치고는 좀 명랑해 보이는데요’라는 말을 들은 분도 계세요.” 윤 팀장은 고양여성민우회 부설 성폭력상담소에서 4년 7개월간 일한 경험이 있다. ‘비슷한 피해를 경험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의견을 받아서 지난달 처음 피해자 간담회도 열었다.
특히 2018년 수사관에 의한 강간을 공개 증언한 김선옥씨의 용기에 힘입어 피해 조사를 신청한 이들이 많았다. 김씨의 인터뷰는 큰 파장을 불렀고 정부 조사로 이어졌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현재 암투병 중이다.
김씨는 당시 서지현 검사의 ‘미투’ 폭로에 용기를 얻어 38년 만의 공개 증언에 나섰다. 윤 팀장은 “수사기록을 보니까 (가해자가 유력한) 담당 경찰 이름이 있었다”며 “그런데 그 인터뷰에서 ‘소령 계급’으로 잘못 보도되는 바람에 여러 어려움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윤 팀장은 피해사실 기록에 있어 신중한 접근을 당부했다. “피해자분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기자분들이 많으신데, 사실관계를 잘못 기록했을 때 그게 피해자에게 나중에는 부담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 생기거든요. 가해자를 잘못 특정해서 부각하면 피해자에게 소송을 걸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요.”
진한 아쉬움을 남기고
피해자들이 털어놓은 끔찍한 기억들은 윤 팀장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광주 출장 갔던 날, 밤에 숙소에 있는데 2명이 우리 방에 들어와서 저를 강간하려고 하는 거예요. 꿈이었어요. 너무 생생했어요. 남성 둘의 검은 그림자가. 몸이 절대 움직이지 않고 소리도 나오지 않고요. ‘대리 외상’인 거죠. 피해자분이 ‘몸이 장작개비 같았다(얼어서 뻣뻣했다)’고 하셨는데, 그걸 꿈에서 경험한 거죠.”
피해를 당하고 찢어진 치마 대신 공장에서 쓰는 앞치마를 두르고 집에 갔다는 증언을 들은 날엔, 윤 팀장도 하의가 없어서 앞치마를 두르고 회의를 하는 꿈을 꿀 정도였다. “조사를 지원하는 상담 전문가를 전문위원으로 위촉했는데, 그건 피해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저희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며 “이런 것을 털어 놓고 이야기하곤 했다”고 말했다.
조사 대상 사건 중 조사팀이 진상으로 봤던 2건이 전원위원회(전체 9명 위원)에서 진상규명 불능 판정을 받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40년 만에 조사를 하면서 목표는 우리가 조사를 해서 피해자라고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 사건은 우리가 상정한 원안대로 진상규명 의결되게 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두 건이 그 목표에 이르지 못했죠. 당사자들도 40년 만에 어렵게 용기를 내었는데 국가로부터 ‘진상규명 불능’ 쪽지가 와서, 굉장히 괴로워하고 힘들어하셨어요. 저희도 마찬가지였고요.”
위원회는 처음부터 위원 구성 면면을 두고 잡음이 많았다. 윤 팀장이 이끈 조사4과 3팀도 팀원(6급 조사관)이 4번 바뀌었다. 윤 팀장은 전임 이춘희 팀장에 이어 지난해 3월부터 일하고 있다. 전임 팀장도 사명감을 가지고 임해왔는데, 힘들어 구안와사(안면마비) 증세가 생겼다고 전했다. 위원회 보고서 뒷부분의 소수의견을 보면, 내부 시각 차이에서 오는 갈등 양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보고서의 결론(243쪽)은 ‘사건 후 사망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피해자, 현재까지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피해자와 그 가족의 고통스러운 삶을 위로할 방안을 찾지 못했다’로 끝맺는다.
윤 팀장은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을 묻자, “많은 분들이 (위원회 홈페이지에 게재한) 보고서를 읽어주시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사실을 알아야 다음에 자신의 역할을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공개된 보고서와 심의·의결 속기록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조사하고, 어떤 사람들이 의결을 하는지, 그들이 이 사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나요. 문제적으로 비판적으로 읽어주시고, 이후 연구가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이진희 논설위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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