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체류자였는데...‘3000억원대 몸값’ 화가로 인생역전
불법 체류 20대 청년, 뒤늦게 화가의 길
‘인터체인지’ 3699억 세계 최고가 추상화
추상·구상 동시에 美 추상표현주의 탄생
아트바젤 홍콩·베니스 비엔날레서도 명성
“그렇게 독특한 작품이 어떤 조짐도 없이 우리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이런 사실을 믿기가 어렵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라는 저명한 비평가가 작품에 엄청난 ‘미적 의미’를 부여한 뒤로, 그는 미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성장합니다. 네덜란드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스물두 살에 미국에 밀입국, 불법 체류자 신분이었던 그 사람. 뒤늦게 걷기 시작한 화가의 길 위에서 그의 인생은 찬란히 빛나게 됩니다. 목수, 페인트공 등 육체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그는 서른이 넘어서야 전업 작가가 됐는데요. 그런데 그의 작품은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추상화로 거래됐습니다.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살았던 그의 이름은 바로 윌렘 드 쿠닝(1904~1997). 드 쿠닝은 그야말로 ‘아메리카 드림’의 대명사, 그 자체입니다. 미국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피카소’로 불리게 된 그는 20세기 회화 역사에서 뉴욕을 우뚝 솟게 만들거든요(추후 미국인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작품 가격이 설명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싸게 판매된 추상화, 이 그림을 그린 작가가 바로 드 쿠닝입니다. 바로 작품명 ‘인터체인지(Interchange)’입니다. 나이 쉰하나에 그린 드 쿠닝의 이 작품은 미술시장을 통틀어 두 번째로 높은 값에 거래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2015년 개인 간 거래된 ‘인터체인지’의 작품 가격은 3699억원. 대형 헤지펀드 시타델의 창립자인 케네스 그리핀, 그러니까 미국의 슈퍼리치가 이 작품을 구매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폴 고갱, 구스타프 클림트, 렘브란트 반 레인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그린 작품보다 더 비싼 가격에 말이죠(세상에서 가장 비싸게 판매된 작품 1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살바토르 문디’입니다).
올해 열린 세계적인 미술계 이벤트에서도 그의 명성이 확인되는 중입니다. 올해 3월 열린 아시아 최대 아트페어 ‘아트바젤 홍콩’에서 최고가로 낙찰된 작품이 바로 드 쿠닝의 1986년작 ‘무제 III’(120억 원)이고요. 그 다음 달인 4월에 개막한 최고 권위의 국제 현대 미술제인 ‘베니스 비엔날레’ 개막에 맞춰 베니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열린 대표 전시도 드 쿠닝 작품전입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요즘 서구 주류미술에서 소외된 ‘제3세계’ 미술이 급부상하고 있다고 한들, 세계 미술계의 중심을 지키는 미국의 자부심을 곳곳에서 체감할 수밖에 없죠.
세상에서 가장 높은 가격에 판매된 바로 그 추상화를 잠시 감상해 볼까요. 드 쿠닝이 그린 세로 2m, 가로 175㎝가량의 대작. 이 거대한 캔버스 화면에는 거친 붓질로 범벅된 선이 눈에 띕니다. 강렬하게, 그러면서도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선. 몹시 불안해 보이기도 하고요.
여기까지만 보면,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특별한 건가 싶을 텐데요. 그런데 여러 색채들이 선과 엉기면서 만들어낸 어떤 형태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 그림의 중심에는 앉아있는 사람의 형상이 흐릿하게 감춰져 있거든요(작품 제목을 바탕으로 추정하지 않으면 너무도 모호한 영역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드 쿠닝은 인물의 흔적을 끝까지 놓지 않고, 형상이 나타내는 느낌을 최대한 비슷하게 그려내는 추상 작업을 했습니다. 한 마디로 형식은 추상인데, 내용은 구상인 것이죠. 이렇다 보니 드 쿠닝의 그림은 ‘현대미술에서 구상이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요. 미술사적인 관점에서 이런 도전적인 질문을 처음으로 촉발시킨 작가가 바로 그인 겁니다. 인물의 형태를 지워가며 그리는 관조적인 추상화, 그 전조를 알리는 ‘역사적인’ 작품인 만큼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다만 드 쿠닝은 이 그림을 발표한 1950년대 시기에 “가장 끔찍한 형상을 드러냈다”, “여성성이라는 전형을 모독했다” 등 혹독한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특히 지금의 드 쿠닝을 있게 한 ‘여인’ 연작이 가져온 후폭풍은 거셌습니다. 지금이야 시간이 흐르고 미학적 관점이 확장돼 이런 그림이 낯설지 않게 느껴질 수 있지만, 작품이 처음으로 공개됐을 때에만 해도 그림은 감정적으로 동요를 일으키는 기괴한 화면이었던 건데요(쉽게 풀어보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데 불쾌하기까지 하다”는 겁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도 당시 그를 둘러싼 상황을 이같이 전했습니다. “드 쿠닝은 그림에 특별한 장치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그림 속 인물들이 무척이나 거친, 20세기 중반 대도시 여성들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추상미술 지지자 중 몇몇은 드 쿠닝이 ‘두 마리의 말(구상화와 추상화)’을 동시에 타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며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이 같은 혹평에도 드 쿠닝은 머지않아 ‘미국 추상표현주의’ 탄생을 대대적으로 알리게 됩니다. 물감을 흩뿌리는 기법을 사용하는 액션 페인팅의 대가인 잭슨 폴록과 함께, 유럽의 추상을 넘어선 새로운 회화 양식을 구현한 작가로 재평가 받으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거든요(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유럽이 가진 회화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 탄생한 가장 미국적 사조에 그가 올라탄 겁니다).
특히 드 쿠닝은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렬한 화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아주 빠른 붓놀림으로 작업을 했는데요. 물감을 대하는 드 쿠닝만의 방식은 폴록과 함께 “미국적이다”고 할만한 무언가로 자리매김하게 되고요. 그로 인해 드 쿠닝은 몹시 가난하게 살다 간 같은 세대의 다른 화가들과 달리 살아생전 어마어마한 성공을 누렸습니다(그러나 알코올 중독으로 가정생활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드 쿠닝의 그림들은 달력이나 대형 간판에 나타나는 상업화된 동시대 여성 이미지에 대한 그만의 조롱으로 해석되곤 합니다. 알고 보면 1960대 판을 친 팝아트를 무색하게 하는 도전이었던 건데요.
소위 돈 없고 ‘빽’ 없는 드 쿠닝은 한평생 무엇에 욕망해 이토록 치열하면서도 불안정한 그림에 천착했던 걸까요.
다만 나이가 들수록 드 쿠닝의 화면은 부유합니다. 당김음을 사용해 들쑥날쑥한 박자를 조성하는 재즈처럼 화면 속 선들이 자유롭게 춤을 추죠. 색감도 경쾌합니다.
실제로 70대에 들어선 노년의 드 쿠닝은 거칠고 강렬한 회화와 완전히 단절합니다. 그래서 그의 말년 작품을 보면, 그가 마치 고통스러운 내면과 작별을 고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요. 얼룩진 음주벽으로 드 쿠닝의 건강은 심각하게 나빠졌지만, 그는 93세의 나이로 죽기 전까지 붓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치 완벽한 예술을 위한 자기만의 적절한 템포를 찾았다는 듯, 그림만이 남아 오늘날에도 수백·수천억대에 거래되고 있을뿐이죠.
“나는 ‘좋은 그림(Good Painting)’을 그리는 방법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중략) 나는 생계를 위해 그리지 않는다. 생존하기 위해 그린다.”
이정아 기자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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