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지각변동'…"귀해진 전문의" 헤드헌팅 시장 들썩[전공의 사직 100일②]
전공의·전문의 해외로 눈 돌려
전공의 의료AI 스타트업 진출
[서울=뉴시스] 백영미 송종호 기자 = 의대 증원으로 촉발된 의정 갈등으로 전공의 공백이 100일 넘게 이어지면서 국내 의료계에 빅뱅이 일어날 조짐이다. 전문의 사직과 병원 간 전문의 영입 전쟁, 전공의·전문의 해외 진출, 전공의 의료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진출 등으로 의료 시장에 지각변동이 올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9일 의료계에 따르면 최근 상급종합병원·종합병원 의대 교수(전문의)들이 병원의 경영난으로 자리를 하나둘씩 옮기거나 의료 공백 장기화에 따른 물리적·체력적 한계로 병원을 떠나가고 있다.
최근 전공의 수련병원이지만 상급종합병원은 아닌 A종합병원의 B 교수는 "병원의 경영이 악화돼 사직하고 규모가 좀 더 작은 2차병원(종합병원)으로 가기로 했다"면서 "동료 의사들과 송별회도 했다"고 말했다.
전공의들이 의대 증원과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에 반대해 병원을 떠난 후 과도한 전공의(인턴·레지던트) 중심의 기형적인 인력 구조를 유지해온 대학병원들은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 대학병원들은 고질적인 저수가 체계(원가의 70~80% 수준)에서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전문의 대신 전공의의 최저임금 수준(시간당 1만2000원)의 값싼 노동력에 의존해왔다.
'의료현장 최전선'인 응급의학과 전문의들도 대학병원을 떠나 중소병원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 대학병원들은 전공의 공백으로 인한 절대적인 인력 부족으로 입원·수술 환자 등을 대폭 줄이면서 응급실 진료 여력도 줄어든 상태다. 최근에는 배후 진료과 전문의 이탈로 응급실의 환자 수용 역량은 더 줄었다. 응급실은 응급의학과 전문의의 1차적인 검사나 응급 처치에 이어 배후 진료과에 의한 수술·입원 등 최종 치료가 불가능하면 환자를 수용할 수 없다.
수도권의 C응급의학과 교수는 "일부 몇몇 배후 진료과 교수들이 당직을 빼기 시작했다"면서 "'이런 환자는 수용하지 말아 달라'는 등 배후 진료과의 다양한 요구들로 응급실에 환자를 수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배후 진료과 교수진의 번아웃(탈진)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C교수는 석 달 넘게 인력 부족 속에서 버텨오면서 환자 수용과 관련해 상당한 스트레스와 피로도 누적으로 건강이 나빠져 사직을 앞두고 있다. 대학병원이 향후 제 역할을 하기 힘들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마저 감돌고 있다.
지방의 한 상급종합병원 응급의학과 D교수는 "지방과 수도권을 막론하고 이탈하는 전문의들이 나오고 있다"면서 "남은 동료들에게 부담을 지우기 미안해 참고 버텨오던 의료진들이 '이젠 살아야겠다'고 떠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년이 2년 정도 남았는데 은퇴 시기를 앞당길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특히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의료의 경우 원로 교수 뿐 아니라 젊은 전문의(전임의·조교수·부교수)들도 사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서울의 주요 대학병원 E교수는 "전공의들이 떠난 상황에서 빈 자리를 메워오던 필수의료 주니어 스태프(전문의)들도 과도한 업무량으로 인한 건강상 또는 가정상 이유로 사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의 추가 이탈로 의료 체계가 무너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전문의 중심 병원'으로 개편하겠다는 정부의 청사진 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A교수는 "전공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중증환자 치료 수가를 현실화해야 한다"면서 "또 높여야 할 수가를 다른 수가를 낮춰 확보하는 현재의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식 미봉책은 또 다른 과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다.
대학병원들이 최근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구인 공고에 나섰지만 전공의 공백으로 배출되는 신규 전문의가 없어 '전문의 영입' 전쟁도 벌어지고 있다. 한 종합병원은 전문의들을 대거 확보하기 위해 다른 대학병원의 특정 진료과 의사를 통째로 빼내려는 시도를 했었다고 한다.
고난이도 수술로 꼽히는 미세 접합 수술 전문의들도 하나 둘 그만 두거나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미세 접합 수술은 1mm 이하의 절단 부위 미세 혈관과 신경, 인대 등을 미세 현미경을 통해 정교하게 복원하는 것으로, 많은 훈련이 필요하고 장시간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의사의 끈기와 사명감이 필수다.
서울의 주요 대학병원 F교수는 최근 페이스북에 "미세 접합 수술을 하시는 성형외과 선배 두 분이 그만두기로 했다"면서 "존중도, 대우도, 보호도 받지 못하는 현실이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하셨다"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또 다른 두 분은 독일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고 한다"면서 "경력 20년 베테랑에 실력은 검증됐고 이런 분야 인력은 세계 어디서나 부족하다. 통역 등을 모두 제공받고 급여는 한국의 10배 수준이다. 이렇게 필수의료는 죽어가는 것"이라고 썼다.
전공의들과 의대생들도 미국, 일본 등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특히 최근 1년 새 외국 의대 졸업생들에게 문호를 넓히고 있는 미국 진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미국은 15개 주 정부 차원에서 외국 의대 졸업생이 미국 의사 면허 시험(USMLE)를 보지 않고도 의사 면허를 딸 수 있도록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거나 입법을 추진 중이다.
최근 의료AI 업계는 의사 영입 움직임이 일면서 들썩이고 있다. 의료AI 스타트업인 G사는 최근 의사 면허 소지자를 대상으로 채용에 나섰다. 이 회사 관계자는 "의학 분야에서 전문적인 소견이 필요해 채용 중"라고 말했다.
헤드헌팅 업체를 통해 의사 채용에 나선 기업도 있다. H사는 "요즘 시기 (의사) 채용 공고를 올리는 것은 부담스럽지만, 헤드헌터를 통해 채용을 의뢰했고, 인재들을 추천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 구직구인 플랫폼에는 헤드헌터 업체들이 의사면허 보유자, 대학병원 의료기관 근무 경력 등을 조건으로 내건 구인 게시물이 올라오고 있다.
일부 전공의들은 의료AI 기업에서 자문 역할을 하고 있다. 한 의료AI 업계 관계자는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의 사직서가 아직 수리 되지 않아 풀타임 근무는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다”며 “소수 전공의들은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의료AI 업계에 자문 역할로 기여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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