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이 발의, 한동훈이 찬성한 ‘간첩법’…21대 국회서도 처리 무산
21대 들어선 김영주 의원이 첫 발의
4건 중 3건이 野 발의 법안이었는데
野법사위원들이 제동 걸어 처리 불발
해외선 조작정보 활용 ‘인지전’ 활발
방첩기관 내 별도 조직 신설 등 노력

29일 정치권에 따르면 간첩법 4건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1소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이날이 21대 국회 임기 마지막 날이어서 자동폐기만 앞둔 것이다.
개정안의 핵심은 형법 98조 1항을 수정하자는 것이다. 해당 조항은 ‘적국을 위해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를 사형, 무기징역, 또는 7년 이상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적국은 북한뿐이다. 현행법대로라면 북한 외 어느 나라에 우리의 국가기밀을 유출해도 간첩법으로 처벌하기 어렵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법조문상의 ‘적국’을 ‘외국’으로 고치자는 것이다.
21대 국회 들어 간첩법을 가장 먼저 발의한 이는 국민의힘 김영주 의원이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부의장으로 재임하던 2022년 8월15일 광복절을 기해 대표 발의했다. 이후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와 이상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이 잇달아 같은 취지로 발의했다. 국민의힘 조수진 의원도 이러한 내용의 간첩법을 발의했다. 발의 시점 기준 당적을 놓고 보면 4건 중 3건이 민주당 법안이다.

21대 들어선 민주당 중진들이 주로 발의했지만, 민주당 소속 법안1소위원들이 제동을 걸었다.
1소위 회의록에 따르면 박주민 의원은 산업기술보호법 등 별도 법안이 있는 점을 거론하며 “국가기밀의 폭을 좁혀야 되는 것 아니냐는 취지”라고 했고, 박용진 의원은 “간첩으로 딱 규정해서 막아지진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것(국가기밀)은, 국가기밀 리스트는 어디 있나”라고도 했다. 권칠승 의원은 “(국가기밀 개념이) 그렇게 명확한가”라고 했다. 이탄희 의원은 “군사기밀보호법 등 다 같이 놓고 심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그러나 세계일보 취재 과정에선 대체로 “반대하는 건 아니다” “법안 취지에 동의한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라고 했다.
대법원은 1997년 이후부터 국가기밀을 ‘비공개된 것이어야 하고 실질적으로 비밀의 가치가 있는 것에만 국한하는 것’, 즉 ‘실질비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법적으로 매우 좁게 해석하는 추세다. 국방·외교·경제에 악영향을 주는 정부·국회·법원의 중요자료나 국책연구소의 중요정책 및 기술자료, 국가가 분류한 국가전략기술, 방위산업기술 등이 이에 해당한다.
법조계 관계자는 “간첩 행위 처벌 대상을 ‘적국’에서 ‘외국’으로 고친다 해서 민주당 우려처럼 처벌 대상이 과도하게 확대될 가능성은 작다”고 말했다. 법무부도 “해외의 입법사례를 검토해보면 간첩 행위를 ‘적국’과 ‘외국’으로 구분하고 있지 않다”며 “국가기밀도 적국에 해당하는 국가기밀과 ‘외국 등’에 해당하는 국가기밀을 별도로 분류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법사위 한 인사는 “민주당이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나머지 법 개정을 반대하는 것 아닌가 싶다”고 했다.

간첩법 개정은 여당인 국민의힘 법사위원들은 물론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도 적극 찬성하는 입장이다.
한 전 위원장은 법무부 장관 시절 세계일보에 “미국, 중국, 독일, 프랑스 등 주요 국가들은 우리나라와 달리 ‘적국’에 국한하지 않고 ‘외국’에 대한 국가기밀 누설행위를 처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전 위원장은 “이번에 형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우리 국가기밀이 북한이 아닌 중국 등 외국으로 누설되는 것은 처벌 못 하고, 반대로 그 나라들 국가기밀이 우리나라로 누설되는 것만 처벌되는 누가 봐도 불공정한 상황이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또 “격변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외국’과 ‘적국’은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구분일 뿐”이라며 “이번 형법 개정은 우리 국민과 국익을 지키는 최소한의 법적 안전망이고, 반대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고 했다.
여당 비대위원장에 취임해서도 간첩법 추진 의지를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국민의힘의 4·10 총선 패배로 법 개정 움직임은 동력을 잃고 말았다.
◆각국은 ‘인지전’ 대응 ‘한창’
간첩 행위 처벌을 위한 기본법조차 미비한 우리와 달리 각국의 방첩기관들은 인지전에 대응하기 위한 별도 조직을 만드는 등 수준 높은 방첩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인지전은 특정 국가의 지휘부나 국민 등에게 조작된 정보를 확산시키는 수법으로 잘못된 결정을 유도하거나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일종의 ’비살상 전투‘다. 학술 동아리, 음식점 등을 가장한 오프라인 형태는 물론 언론사 사이트를 가장한 조작 사이트, 일반에 친숙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인지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인지전은 적의 군과 지휘부를 상대하는 기존의 전쟁 방식과 달리 불특정 다수 국민 전반에 직접적으로 접근해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고 있다. 안보 분야 한 전문가는 “해외의 방첩기관들은 인지전에 대응하는 조직을 만들어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며 “간첩법조차 없는 우리와는 상당히 대비되는 수준이다. 늦었지만 우리도 국익 관점에서 하루빨리 법망 미비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배민영 기자 goodpoin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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