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 25만원’으로 할 수 있는 것들[복지의 조건]
모든 사건엔 이유가 있고 그 배경엔 정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선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요. 복잡한 보건복지 정책을 알기 쉽게 풀어드립니다.
더불어민주당이 4·10총선 때 공약했던 ‘민생회복지원금’을 22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지역화폐 형태로 1인당 25만 원씩 주고 기초생활 수급자와 취약계층엔 10만 원을 더 지급하는 방식입니다. 약 13조 원이 든다고 합니다.
- 출생아 23만 명에게 5000만 원씩 줄 수 있습니다.
- 저소득층 긴급복지 지원금을 36배로 늘릴 수 있습니다.
- 코로나19 때 ‘게임 체인저’였던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 기술을 국산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도 11조4000억 원이 남습니다.
- ‘간병 살인’ 부르는 간병비를 전액 국가가 책임지고도 거스름돈이 3조 원 남습니다.
즉, 전 국민에 25만 원을 주는 게 정당화되려면 위에 나열한 용처보다 더 시급하고 효과도 크다는 걸 입증해야 합니다. 과연 그런 효과를 확신할 수 있는지, 국회가 더 서둘러야 할 일이 있는 게 아닌지 살펴봤습니다.
● 전 국민 현금 지원, 코로나19 땐 효과 어땠나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19일 당원 콘퍼런스에서 “민생회복지원금을 지급하면 소비 확대로 자영업자들의 숨통이 트이고 결과적으로 골목 경제와 지방경제가 살아나는 효과를 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단순히 ‘돈을 주자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보들”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바보가 아니므로 민생회복지원금이 단순히 돈을 주는 것 말고도 어떤 효과를 낼지 근거를 찾아봤습니다. 먼저, 이 대표의 주장처럼 소비 진작과 소상공인 지원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할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선 비슷한 ‘실험’이 이미 이뤄진 적이 있습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4·15총선을 약 보름 앞두고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긴급재난지원금입니다. 원래 소득 하위 70%에 준다고 했다가 국회 심의를 거치며 대상이 전 국민으로 늘어났습니다. 모든 가구에 40만~100만 원을 지급하는 데 총 14조3000억 원이 들었습니다.
또 2021년 8월 대한경영학회지에 게재된 논문에 따르면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은 사람은 소비를 미리 앞당겨서 하고 그 이후엔 오히려 지출을 줄였다고 합니다. 특히 유통업계에선 지원금 종료 이후 오히려 대형 온라인 매장 소비와 소상공인 매장의 카드 사용액 격차가 더 벌어졌습니다. 연구진은 “소상공인 간접 지원의 정책 효과가 크지 않았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 아니냐’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19 땐 방역 조치가 삼엄해서 소비 심리가 살아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고물가에 시름겨워하는 국민에게 현금 지원이 단비 같은 혜택이 될 거라고 할 수도 있죠.
● KDI “물가 안정 해칠 우려”
하지만 KDI는 ‘바로 지금’이라서 현금 지원은 불필요하다고 경계합니다. 이달 13일 발표한 ‘고물가와 소비 부진: 소득과 소비의 상대가격을 중심으로’ 보고서를 보면 연구진은 “올해 실질 구매력이 상당폭 개선돼 소비가 증가할 전망”이라며 현금 살포와 같은 부양책이 시급하다고는 보기 어렵다고 진단했습니다. 오히려 “점진적인 인플레이션 안정 추세를 교란할 가능성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 연구를 종합하면, 전 국민 대상 현금 지원이 ‘소비 진작과 소상공인 지원을 통한 경제 활성화’라는 효과가 낼 거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학자들은 ‘물가 안정을 도리어 늦출 수 있다’고 우려하거나 ‘차라리 선별 지원이 낫지 않냐’고 하고 있습니다.
그럼 남는 건 ‘부의 재분배’ 효과입니다. 전 국민에게 현금성 소비 쿠폰을 배포할 땐 돈이 흐를 방향을 크게 세 갈래로 기대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고소득층→저소득층’입니다. 다르게 걷어서 똑같이 나눠주기 때문입니다. 둘째, ‘회사원→자영업자’입니다. 지역화폐의 용처가 그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셋째, ‘법인→개인’입니다. 세금은 법인(기업)도 내지만 쿠폰을 받는 건 개인이니까요.
이중 둘째(회사원→자영업자)는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 때 효과가 작다고 결론 났습니다. 셋째(법인→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현금 살포의 반사이익을 누리지 못한 기업이 직원 월급을 줄이거나 물건값을 올리는 방식으로 손익을 맞추면 결국 소비자 이익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는 건 첫째 효과, 고소득층의 부를 저소득층에 나누는 겁니다. 복지 국가를 표방하는 한국에서 이런 정책 목표 자체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문제는 그 목표를 위한 최선의 수단이 정말 ‘전 국민 현금 지원’이냐는 겁니다. 경제 활성화 효과도 미미하고, 소상공인 지원 효과도 크지 않고, 남은 건 넉넉한 이들의 재산을 어려운 이들에게 분배하는 효과뿐이라면, 왜 지원 대상이 꼭 ‘전 국민’이어야 하는 걸까요? 그리고 그걸 왜 꼭 총선 직전에 발표하는 걸까요?
● 출생아 1명당 5000만 원 주고도 1.5조 원 남아
13조 원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면 먼저 떠오르는 건 저출생 대응입니다. 최근 국민권익위원회가 부영그룹의 직원 복지처럼 정부가 ‘출생아 1명당 1억 원’ 등 파격적인 현금 지원을 신설하면 출산에 동기 부여가 되겠는지 온라인 설문을 했죠. 그 결과 ‘된다’는 응답이 62.6%였습니다.
13조 원이면 지난해 출생아 23만 명(잠정 집계)에게 5000만 원씩 줄 수 있습니다. 총 11조5000억 원이 들어가니 1조5000억 원이나 남네요.
거스름돈에 해당하는 3310억 원만으로도 ‘첫만남이용권’의 지급액을 2배 가까이로 늘릴 수 있습니다. 생애 초기 아동 양육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도입한 정책이죠. 현재 출생 아동에게 200만 원을 주는 데 총 3804억 원이 듭니다.
13조 원이면 0, 1세 아동을 둔 부모에게 주는 ‘부모급여’ 지급 예산도 몇 배로 키울 수 있습니다. 출산과 양육으로 손실되는 소득을 보전하고 밀착 돌봄이 중요한 영아기를 이겨낼 수 있도록 매달 0세 아동 가정에 100만 원, 1세 아동 가정에 50만 원을 각각 주는 정책입니다. 여기 드는 예산이 2조8887억 원입니다. 13조 원이면 0세 가정에 매달 450만 원을 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 기초생계급여 3배로, 장애연금·수당 13배로
앞서 전 국민 대상 현금 지급은 소득 재분배 기능 말고는 별다른 효과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가장 직접적인 소득 재분배 수단은 기초생활 수급자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겁니다. 당장 생활비가 부족한 저소득층에 지원을 늘리면 소비 증대 효과도 클 것으로 기대됩니다.
정부는 기초생활 생계급여 예산을 지난해 6조141억 원에서 올해 7조5411억 원으로 늘렸습니다. 한 해 만에 관련 예산을 25% 넘게 늘린 건 처음입니다.
그런데 만약 민생회복지원금 소요 예산 13조 원을 전부 기초생활 생계급여에 투입하면 어떻게 될까요? 저소득층이 받는 혜택이 무려 3배 가까이로 늘어납니다. 한 마디로 빈곤 문제가 상당 부분 해소되는 겁니다. 소득 재분배를 통한 빈곤의 해소. 이게 바로 민주당 강령에 적시된 “단절 없는 맞춤형 기본생활 보장 정책”이 아닌가요.
아니면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건 어떨까요. 저소득 중증 장애인에게 매달 32만~42만 원을 주는 장애인연금과 저소득 경증 장애인에게 월 3만~6만 원을 주는 장애수당의 올해 예산을 다 합해도 1조 원입니다. 이걸 13배로 늘리면 우리나라는 단숨에 장애인에겐 북유럽 못잖은 복지 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 ‘간병 지옥’ 없애고 최첨단 백신 플랫폼 갖출 수 있어
지난달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에서 90대 치매 환자와 60대 두 딸이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경찰은 치매를 앓던 A 씨가 사망하자 그를 돌보던 자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관련기사: 미등록 치매환자 38만명… 90대 노모-60대 두 딸 ‘老老간병’ 비극〉
간병비는 ‘초고령 한국’의 큰 고민 중 하나입니다. 간병비는 2015년 이후 일부 간호·간병 통합서비스 도입 병동에서 건강보험이 적용됐지만 대체로 건보 제도 바깥에 있습니다.
정부가 올해 요양병원 간병지원 시범사업을 처음으로 벌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요양병원 20곳의 환자 1200여 명의 간병비를 일부 지원하는 데 85억 원을 쓰기로 했습니다. 시범사업부터 하는 건 ‘간병이 공짜’라고 하면 불필요한 간병 수요까지 생길 것을 우려해서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큰 재정이 들기 때문입니다. 치매 등을 앓는 고령 환자가 많아져서죠.
그런데 13조 원이 있으면 시범사업을 건너뛰고 곧장 사적 간병비를 바로 국가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국내 한 연구에 따르면 연간 사적 간병비는 2008년 3조6000억 원에서 2018년 8조 원, 2022년 10조 원으로 늘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부는 1년 전 코로나19 위기 종식을 선언하며 “신종 감염병 발생 이후 100일 이내에 mRNA 백신을 개발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2년간 327억 원을 들여 활동한 국가 mRNA 백신개발사업단은 다음 달이면 활동을 종료합니다. 추가 사업 예산이 전부 삭감됐기 때문입니다.
반면 일본은 약 1700억 엔(1조5000억 원)을 투자해서 지난해 자체 mRNA 백신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mRNA 백신은 일단 플랫폼을 갖춰두면 코로나19와 다른 감염병이 유행해도 그것에 맞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 여론조사서 51%가 “‘전 국민 25만 원’ 안 된다”
21~23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이 전국 만 18세 이상 1001명에게 민생회복지원금에 대한 찬반을 조사한 결과 “지급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 51%로 “지급해야 한다”의 43%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조사는 이동통신 3사 제공 무선전화 가상번호를 무작위 추출해 전화조사원 인터뷰 방식으로 이뤄졌고, 총통화 8444명 중 1001명이 응답을 완료해 응답률은 11.9%,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였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민생회복지원금은 포퓰리즘 정책조차도 아닙니다. 국민 대다수가 ‘그걸 왜 하냐’는 의문을 갖는 포퓰리즘 정책이 어딨겠습니까. 오히려 이 대표의 대통령 선거 공약이었던 ‘기본소득’의 예고편이라는 일각의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아무 조건도, 이유도 없이 돈을 푸는 게 이상해 보이지 않도록 전례를 만드는 작업이라는 해석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저는 소득 재분배를 위한 현금 지원 자체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초생활 보장이나 긴급복지처럼 이미 빈곤 완화를 위한 제도가 있고 그 전달체계가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는데 굳이 돈도 더 많이 들고 효과도 간접적인 방식을 택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국가가 기존에 없던 제도를 신설해 파격적인 예산을 투입하는 게 정당화되려면 저출생 문제 해결이나 첨단 백신 플랫폼 구축과 같은, 투자금이 나중에 2, 3배로 돌아올 정책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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