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단 30여명에게만 열리는 이 ‘환상’의 공간은?

백승찬 기자 2024. 5. 29.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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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시간을 칠하는 사람’
극단 하땅세의 ‘시간을 칠하는 사람’.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 제공

공연 시간 10분 전이 되자 서울 낙산 성곽길 끝 가정집의 문이 열렸다. 30여명의 한정된 관객은 신발을 벗고 거실로 안내됐다. 부엌, 화장실이 모두 갖춰진 단독주택이다. 높낮이 차가 있는 객석에 앉자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시원한 물 한 잔 하실 분 있느냐”고 권했다. 물을 마신 관객도 몰랐다. 자신들이 마신 원뿔형 물컵조차 조금 있다 오브제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실제 단독주택을 개조한 성북 라이트하우스에서 6월2일까지 열리는 연극 <시간을 칠하는 사람>(작가 김민정, 연출·무대 디자인 윤시중)은 2019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처음 시범 공연한 뒤 이 극장의 레퍼토리가 된 작품이다. 이번에 부자의 이야기를 모녀의 이야기로, 대극장을 소극장 배경으로 바꿔 처음 선보이고 있다.

빗자루로 방 청소하고, 먼지 훑어내고, 잠시 커피 마시며 한숨 돌리는 중년 여성의 삶이 펼쳐진다. 그는 상을 펴고 밥도 차린다. 이 상차림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곧 드러난다. 작은 집에 교묘하게 숨겨진 곳곳의 통로에서 다른 배우들이 튀어나온다. 말 그대로 발밑에서, 등 뒤에서, 기둥 뒤에서 나온다. 조명이 주백색에서 전구색으로 바뀌는 것만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성북 라이트하우스 전경.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 제공

배우들은 상 위에 깔린 모조 전지에 그림을 그리고 오려서 놀기도 한다. 중년 여성은 어안이 벙벙하다. 중년 여성이 참외를 윗부분만 깎은 것으로 보아 상은 제사상인 것 같다. 그렇다면 배우들은 혼령인가. 배우들의 그림은 어린이처럼 천진난만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중년 여성의 기억인가. 알 수 없다.

제사상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분명하다. 극 중 몇 차례 ‘전남도청’이 언급된다. 배우들 중 여성의 딸도 있다. 딸은 “참외가 먹고 싶다”고 말한다. 참외가 이 작품의 주요 오브제로 등장하는 이유다. 엄마는 딸이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엄마 얼굴 그리던 모습을 떠올린다. 마지막 순간 전남도청으로 들어간 딸은 곧 얼굴에 하얀 천을 덮은 채 눕는다.

이 작은 공간 속 대부분 물체가 극이 시작되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생활 공간에 무심히 놓여 있던 일상용품이 순식간에 접신 혹은 환상의 도구로 변환한다. 배우가 이리저리 기울어지는 상에 올라 동작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상황과 감정이 연출된다.

성북 라이트하우스는 극단 하땅세 단원들이 평소 연습하거나 함께 밥 지어 먹는 공간이다. 이 공간을 활용해 극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에 2022년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를 올려 호평받았다. 하땅세는 향후 <시간을 칠하는 사람>을 에어비앤비 등을 활용해 해외에서도 올릴 구상을 하고 있다.

극단 하땅세의 ‘시간을 칠하는 사람’. 1980년 5월 광주와 관련 있는 듯한 모녀의 이야기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 제공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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