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중국 동포 유가족 인터뷰..."영매 오빠 일송입니다"
오빠는 동생이 살아 돌아오는 꿈을 꾼다. 이룰 수 없는 꿈이다. 평소 동경했던 한국에서 함께 잘살아 보자고 약속했던 동생. 하나뿐인 동생을 떠나보낸 후 오빠는 자신의 꿈도 잃었다. 평범한 일상도 사라졌다. '이태원 참사' 중국 동포 희생자 고 함영매 씨의 오빠, 함일송 씨의 이야기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중 외국인은 26명. 그중 중국 동포는 2명이다. 중국 동포 유가족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뉴스타파가 '이태원 참사 특별법' 통과(5월 2일)를 앞둔 지난 4월 29일부터 4일간 일송 씨와 동행했다.
누나 같던 동생 영매..."오래오래 살고 싶다 했는데"
일송과 영매는 중국 헤이룽장성(흑룡강성) 하이린시(해림시)에서 태어났다. 오빠 일송은 1980년, 동생 영매는 1983년생이다. 집은 풍족하지 않았다. 엄마는 오빠 일송이 12살 때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3년 뒤 아빠는 돈을 벌러 한국으로 갔다. 일송과 영매는 외할머니집에서 자랐다.
영매는 어른스러웠다. 오빠가 사촌형제들과 노는 동안, 영매는 외할머니를 도와 집 청소를 했고, 정리정돈도 잘했다. 할머니는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동생 절반만 따라가라."
사회생활을 먼저 시작한 것도 영매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16살 영매는 취업을 선언했다. 그리고 집에서 1500km 떨어진 대도시 톈진(천진)으로 떠나 공장 일을 시작했다. 설날(중국 춘절) 때마나 영매는 할머니랑 삼촌, 사촌들의 선물을 사 왔고, 할머니집의 장판도 새것으로 갈아줬다.
동생 영매는 대학에 입학한 일송도 살뜰히 챙겼다. 기숙사 생활은 괜찮은지 물었고, 옷을 사줬다. 김치를 담가 갖다준 적도 있었다. 그런 동생을 보며 일송은 "누나 같다"고 생각했다. "계속 동생 뒤를 따라간 것 같아요. 동생이 챙겨주고, 저는 따라가고..."
한국에 먼저 온 것도 영매였다. 2011년쯤 영매는 더 나은 생활과 미래를 꿈꾸며 한국으로 이주했다. 일머리가 좋던 영매는 곧 서울 동대문에 있는 한 물류회사에 취업했다. 중국, 대만, 홍콩 쪽으로 화장품이나 의류 등을 수출하는 회사였다.
한국에 정착한 영매는 오빠를 불렀다. 당시 중국에서 일송은 혼자였다. 한국에서 돌아온 아빠는 이미 수년 전 세상을 떠났다. 다시 오빠와 동생 둘만 남았다. '형제 둘밖에 안 남았는데 같이 살아야 되지 않느냐'는 동생 영매의 말에 2013년, 일송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 가는 것, 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선 너무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했죠. 발전된 나라에 가서 자기 인생을 더 발전시킬 수도 있고...(한국은 중국 보다) 더 나은, 더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거든요.
- 함일송 /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함영매 씨 오빠
남매는 서울 쌍문동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오빠 일송은 명동에서 일을 처음 시작했다. 가게에서 손님을 상대하는 일이라 퇴근이 항상 늦었다. 동생은 늘 오빠를 챙겼다. 퇴근하는 오빠에게 전화해서 '오늘은 뭐 먹고 싶어? 통닭 먹고 싶어 아니면 족발 먹고 싶어?'라고 물었다. 한국에서 남매는 약 1년간 함께 살았다. 2014년 동생은 결혼해 이사를 나갔고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안정적으로 정착한 동생의 모습에 오빠는 뿌듯했다.
영매가 처음 이태원에 갔던 그날
시간이 흘렀다. 동생 영매가 일과 육아에 전념해 온 시간이었다. 2022년, 영매는 다니던 물류회사에서 부장까지 승진했고, 아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영매는 '이제 나도 좀 즐기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친구들을 만났,고 좋다는 관광지나 명소도 찾아다녔다. 아들과 단둘이 여행도 자주 갔다. 핼러윈 데이에 이태원에 간 것도 2022년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핼러윈 데이가 뭐길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이지?' 궁금했던 영매는 친구와 함께 이태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망했다.
이태원 참사 피해자들에 대한 소방 구급활동일지, 오빠 일송의 증언 등을 종합하면 영매는 참사 당일 현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 후 영매는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지 않았다. 현장에 계속 누워 있다 새벽이 돼서야 서울 순천향대병원 영안실로 옮겨졌다. 하지만 자리가 부족했던 탓인지 영매는 병원에서도 계속 대기해야 했고, 결국 새벽 5시가 넘어 건국대병원으로 재이송됐다.
동생이 죽고, 방치되고, 병원을 옮겨 다니는 동안, 오빠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10월 29일 밤 일송은 친구와 집들이를 한 뒤 깊은 잠에 빠졌다. 10월 30일 아침 일송의 휴대전화는 계속 울렸지만, 숙취가 있었던 일송은 듣지 못했다. 오전 10시쯤 일송이 일어나 휴대전화를 봤다. 부재중 전화가 10통이었다. 일송이 다시 전화하자 매제(함영매 씨의 배우자)이 받았다. 매제는 병원에 가고 있다고 말했다.
(매제에게) 병원에 왜 가고 있느냐고 물었어요. 경찰에서 전화 왔대요. 시신 확인하라고. 뭔 소리하냐고 말했죠. 그러니까 매제가 “지문까지 확인됐어요"라고 했어요. 그냥 그렇게 아침에 전화로 알게 됐어요.
- 함일송 /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함영매 씨 오빠
동생과 함께 꺼진 공기청정기 소리
일송은 동생의 장례식 상주가 됐다. 장례식이 어떻게 시작해 끝났는지 일송은 기억나지 않는다. 조카 생각만 지금도 또렷하다. 10월 29일 조카가 아빠(함영매 씨의 배우자)에게 물었다고 한다. '엄마는 왜 퇴근했는데 집에 안 오냐'고. 아빠는 '친구들이랑 놀러가서 늦게 올 거니까 먼저 자라'고 했다.
하루가 지나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조카는 또 물었다. 이번에는 영매의 집에 장례식용 사진을 찾으러 온 삼촌 일송에게 '엄마 보고 싶은데 안 오냐'고 질문했다. 일송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모가 대신 말했다. '엄마 출장 갔다. 출장 갔으니까 엄마 못 온다'고. 일송은 서둘러 사진을 챙겨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애한테 거짓말 하고 그냥 그렇게 넘어 갔어요." 아직도 그때 거짓말이 사무치는 듯 인터뷰에서 일송이 눈물을 보였다.
일송의 집에는 동생의 흔적이 많다. 오빠가 새 집으로 이사할 때 동생은 공기청정기를 사줬다. 이사 때 인테리어를 전부 다시 해 먼지가 많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동생은 공기청정기를 안방에 놔줬다.
동생의 죽음 후 오빠는 공기청정기를 켜지 않는다. 공기청정기의 '위잉' 소리가 동생을 생각나게 한다. 동생을 잃은 상실감을 일송은 매일 술로 채운다. 일송은 "참사 이후로 매일 (술을) 먹는다. 안 먹으면 잠이 안 온다"고 말했다.
사실, 제 앞에 누나가 한 명 있었거든요. 누나는 태어나고 10개월 만에 그냥 돌아가셨어요. 동생이 항상 하는 얘기가 자기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대. 자기는 엄마 몫, 아빠 몫 다 챙겨서 오래오래 살 거라고 했어요. 그렇게 엄마, 아빠처럼 쉽게 안 죽는대. 그런데 다 죽고...아, 어떻게 어떻게 나 혼자만 남는 건지...
- 함일송 /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함영매 씨 오빠
'선진국' 한국의 진실
일송은 건설 노동자다. 새벽 4시 20분쯤 일어나 출근해 오후 4시쯤 퇴근한다. 현재 유가족 활동과 생업을 병행하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유가족 활동에 전념하고 싶지만, 챙겨야 할 가정이 있다. "먹고 살아가야 되고, 또 먹고 살아 남아야 유가족 활동도 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주 6일 고된 노동을 하지만, 동생과 관련된 활동이 있으면 빠짐없이 나간다. 여러 유가족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국회도 간다. 국회는 이태원 참사로 처음 가봤다. 처음에는 국회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정치에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여당과 야당이 무엇인지, 대통령 거부권은 어떤 건지, 국회에서 법은 어떤 과정을 통해 통과되는지 다 알게 됐다. 1년 반 넘게 유가족협의회 활동을 한 결과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밥 먹고 TV 켜요. 무조건 뉴스 봐요." 일송이 말했다.
일송은 2022년 12월 초 유가족협의회 창립 때부터 함께 했다. 가끔은 한국말이 서툴고, 또 중국인이라는 사실이 일송을 주저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유가족협의회에서) 앞장서지는 못 해도 같이 서 있자'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사촌 동생이 장례식장에서 인터뷰한 적 있어요. 인터뷰를 통해서 유가족분들이 알게 된 건지 연락이 왔어요. 가족들이 모인 카카오톡방이 있는데 참석하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유가족협의회에 들어가게 됐고, 그때부터 같이 활동했어요. 말재주도 없고 좀 내성적이다 보니까 사람을 만나는 게 조금 어려웠어요. 더군다나 중국에서 왔고 언어도 좀 어려움이 있고요. 그래서 앞장서는 건 좀 두려웠어요. 앞장서지는 못하지만 옆에서 같이 서주고 같이 힘을 모아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함일송 /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함영매 씨 오빠
이태원 참사 책임자들에 대한 재판에도 틈틈이 참관한다. 지난 4월 29일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에 대한 12차 공판이 열린 서울서부지방법원에도 일송이 있었다. 2시간 넘게 이어진 재판에서는 일반 한국인도 알아듣기 힘든 법률 용어들이 계속 오갔지만, 일송은 방청석에서 흐트러짐 없이 집중력을 유지했다. 왜 계속 재판에 오는지 물었다. 일송은 '당연히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저희들 일이잖아요, 저희들이 당사자고요. 당연히 저희들이 나서야죠. 기사도 봤는데, 재판 내용이 전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간략하게만 나오더라고요. 그것만으로는 (이태원 참사의) 전부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재판) 내용을 정확히 듣고 보면 진실을 알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참석하고 있어요.
- 함일송 /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함영매 씨 오빠
이날 재판에는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이 증인으로 참석했다. 이임재 전 용산서장이 "참사 며칠 전 서울경찰청에 기동대를 요청했다"고 계속 주장해서였다. 김 전 청장은 이태원 참사 이후 계속 직을 유지하다가 지난 1월 기소된 후 직위해제됐다. 재판 시작 전, 서울서부지법 1층 출입구에는 김 전 청장을 촬영하기 위한 취재진이 포진해 있었다. 김 전 청장은 법원에 따로 요청해 지하 1층 직원용 출입구로 몰래 들어갔다.
이날 김광호 전 청장을 처음 본 일송은 서울의 치안을 책임졌던 그가 어떤 말을 하는지 귀 기울였다. 김 전 청장은 재판에서 "경찰의 주된 업무는 범죄 진압이지 인파 관리 등은 중심이 아니다"고 말했다. 또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희생양을 찾으려고 해선 안 된다"고도 했다. 김 전 청장은 현재 진행 중인 본인 재판에서 '완전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일송은 박희영 구청장 등 용산구청 관계자, 박성민 전 서울경찰청 정보부장 등 다른 책임자들의 재판도 참관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일송은 스스로 책임을 인정하는 공직자를 본 적이 없다. 한국을 '같은 민족', '선진국'이라며 동경했던 일송은 이제 '한국이 무섭다'고 말했다
(한국은) 더 나은 민족이었고, 같은 언어를 쓰고 있고, 또 많이 발전된 나라였고, 모든 면에서 다 앞선 선진국이라서 오게 됐고요. 그런데 참사 겪으면서 진실을 알게 된 거죠, 그러니까 한국에 대한 진실. 국가의 무능으로 159명이나 억울하게 죽었는데, 한 사람도 나서서 잘못을 인정 안하고...자기네는 '열심히 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더 이상 모르겠다. 우리는 무죄다'...이제는 한국 사회가 좀 무서워요.
- 함일송 /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함영매 씨 오빠
특별법 통과됐지만, 동생은 돌아오지 않는다
지난 5월 2일,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설치 등이 목적인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통과됐다. 법은 그대로 정부로 넘어간 뒤 공포됐다. 지난 1월 말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3개월 만에 진상규명의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유가족이 염원했던 특조위는 올해 안에 출범할 예정이다.
특별법이 통과되던 순간, 일송은 국회에 없었다. 건설 현장 일을 뺄 여력이 안 됐다. 다만 쉬는 시간에 계속 유튜브를 통해 국회 상황을 지켜봤다. 일을 하면서도 그의 관심은 계속 특별법에 가 있었다고 한다. 특별법 통과 소식을 듣고,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일송은 "그렇게 반대하고, 우리한테 정쟁한다고 하다가 갑자기 통과시켜 준다고 하니까 '왜 갑자기?'라는 생각이 들면서 믿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기쁨은 잠시였다. 특별법이 통과돼도 자신의 삶은 그대로라는 걸 일송은 깨달았다. 진상규명을 하고 책임자가 처벌을 받아도, 영매를 만날 수 없는 현실은 절대 변할 리 없었다. "그렇게 애쓰고 원하던 특별법이 통과됐지만 현실은 바뀌는 게 없으니까요. 동생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런 생각이 드니까 '아, 특별법 됐구나' 그냥 그랬어요." 일송은 특별법에 대해 얘기하며 단 한 번도 미소를 보이지 않았다.
일송에게 '특조위를 통해 진상조사가 된다면, 가장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일송은 망설임없이 답했다. "저녁 6시 34분부터 (시민들이) 112신고를 하면서 그렇게 구해 달라고 했는데, 왜 아무도 나서지 않았는지, 왜 누구라도 와서 인파 관리를 해주지 않았는지. 이게 제일 궁금해요."
오빠는 얼마 전 꿈을 꿨다. 동생이 살아 돌아오는 꿈이었다. 너무나 현실 같았다고 한다. 꿈에서 동생은 '참사가 났는데 나는 다른 데 있었다. 지금까지 집에 못 오고 다른 데서 살다가 지금 왔다'고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일송은 생각했다. '이제 나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구나. 원래대로 살 수 있구나.' "꿈에서 엄청 기뻤어요"라고 일송이 말했다.
그러나 깨지 않는 꿈은 없었다. 깨어난 일송의 앞에는 언제나 그렇듯, 현실이 놓여 있었다. 그 지독한 틈바구니에서 일송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누나 같은 동생' 영매를 떠올리며 갈 길을 질문한다.
내가 참사 현장에 있었고 동생이 지금 살아 있었다면 영매는 어떻게 했을까? 그런 생각 많이 하거든요. 내가 진짜 죽었으면 영매는 나를 위해서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어떻게 활동하고 있을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 함일송 /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함영매 씨 오빠
일송의 왼팔 안쪽에는 오래된 문신이 있다. "Work Hard For Dream." '꿈을 위해 열심히 살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제 의미 없는 문신이다. 동생의 꿈을 꾼다는 일송은 정작 자신의 꿈은 잃은 지 오래다. "돈 욕심도 없고, 뭐가 하고 싶은 욕심도 없어요. 계획도 없어요. 그냥 살아 있는 것 같아요. 살아야 된다." '살아야 된다'고 내뱉는 입 위로, 일송의 공허한 눈은 자주, 허공을 응시했다.
뉴스타파 홍주환 thehong@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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