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은 평생에 걸쳐 ‘만들어’진다 [유럽 농촌에서 본 ‘오래된 미래’ ②]

독일 프라이부르크·스위스 혼드리히·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 김다은 기자 2024. 5. 29.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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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는 쉽게 농민이 될 수 없다. 체계적인 농업교육 과정을 거치고 자조 조직을 통해 농민 정체성을 배워나간다. 정부는 농민의 공익성과 전문성을 담보한다.
스위스 베른주에 위치한 농업 전문 평생교육기관 ‘인포라마’의 현장관리자 카티야 샤퍼 씨. ⓒ시사IN 김다은

‘농민’이라는 정체성은 농사를 짓는 순간 얻게 되는 완성형이 아니다. 농민은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만들어진다’. 유럽 농민들은 그 과정을 전문적으로 거친다.

우선 체계적인 농업교육 과정이 있다. 스위스 베른주에 위치한 115년 전통의 농업 전문 평생교육기관 ‘인포라마(Inforama)’가 대표적이다. 작물 재배부터 축산·기계·농업경영 등 이론 학습과 농장에서 이루어지는 현장실습을 병행한다. 교육과정 3년을 거쳐 국가 자격시험에 합격하면 직불금 등 농민 지원정책을 받을 수 있는 ‘농민’ 자격이 주어진다. 아무나 쉽게 농민이 될 수 없다. 정부는 농민의 ‘먹이고 살리는 노동’의 공익성과 전문성을 담보한다. 스위스 최고 헌법인 ‘연방헌법’에 그 근거가 담겨 있다. 연방헌법 제104조는 식량을 공급할 뿐 아니라 경관을 유지하고, 인구를 분산하며, 환경을 보호하는 농업의 다원적 역할을 명시하면서 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의 원칙을 담았다.

치즈 만들기 실습을 하고 있는 인포라마 학생들. 1~2학년은 농장에서 진행되는 현장실습을, 3학년은 교내에서 진행되는 이론 교육을 중심으로 수업을 받는다. ⓒ시사IN 김다은

농민 자격을 부여받은 이후에는 ‘농민 공동체’ 속에서 연대와 협력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 핵심은 협동조합·농민협회 같은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다. 정서적 공유 의식을 바탕으로 스스로 모인 공동체라는 뜻이다. 이 과정을 통해 농민 개인이 아닌 집단의 권리와 책임을 배운다. 독일에서 최초로 반핵운동을 주도한 농민 조직 ‘바덴 농업협회(BLHV·Badische Landwirtschaftliche Hauptverband)’도 이 중 한 곳이다.

각기 다른 이해관계, 어떻게 조율할까

4월17일, 독일 남서부 프라이부르크에 위치한 바덴 농업협회를 찾았다. 이곳은 전문가 100여 명이 근무하며 농민을 위한 교육·상담·행정 및 법적 지원을 한다. 예컨대 직불금을 받기 위한 서류작업 지원, 농장 상속 시 필요한 행정 컨설팅, 태양광 패널을 농장에 설치하는 일에 대한 자문 등이 이들의 업무에 포함된다. 바덴 농업협회에서 미디어 책임자로 일하는 파트라이그 엘스너 씨는 “농민들이 함께 모여 친목을 쌓을 수 있도록 다양한 휴가 프로그램도 직접 만든다”라며 여행 팸플릿을 꺼내 보였다. 나무와 통유리로 만들어진 협회 사무실은 누구나 편하게 방문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요청할 수 있는 곳이다.

바덴 농업협회는 독일 내에서 최초로 반핵 운동을 진행한 농민 조직으로, 현재 농업인을 위한 교육·상담·정책 제안을 하고 있다. ⓒ대산농촌재단

동시에 협회는 농민의 목소리를 대변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건물 입구에는 최근 곳곳에서 열린 농민 시위를 상징하듯 트랙터가 그려진 녹색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영국과 유럽연합(EU) 27개국 중 22개국 농민들이 참여한 트랙터 시위는 농업 분야에 대한 EU의 엄격한 환경규제에 반대하며 벌어졌다. 농민들은 코로나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기후위기에 따른 피해 등으로 농업 생산 비용이 치솟는 가운데 디젤 보조금 삭감 및 환경규제가 지나치게 빠르고 엄격하게 진행된다며 반발했다.

농민들은 EU 본사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 몇 달간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결국 올해 6월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있던 EU는 정치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전략적 후퇴를 선택했다. ‘유럽 그린 딜’의 핵심 법안인 ‘자연복원법(NRL·Nature Restoration Law)’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한 것이다. NRL은 경작지의 4%를 휴경지로 남기고, 2030년까지 오염된 육지와 바다의 20%를 복원하며, 살충제 사용도 50% 줄여야 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트랙터 시위에 참여한 요제프 하이머 전 독일 켐프텐시 농업국장은 농민들이 하나로 결속하기 때문에 힘이 생긴다고 말했다. “물론 농민들은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누구는 대농이고 누구는 소농이다. 받는 직불금 수준도 다르다. 바뀐 정책으로 인한 피해의 정도도 서로 다르다. 하지만 하나로 뭉쳐야 협상력이 생긴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결국 희생을 감수하고, 시민들은 이런 과정을 이해한다.” 독일 여론조사기관 포르사(Forsa)에서 진행한 1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 국민 81%는 농민들의 트랙터 시위를 지지한다고 답했다.

3월26일 EU 본사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 농민들이 모여 트랙터 시위를 벌였다. EU는 ‘자연복원법’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했다. ⓒEPA

바덴 농업협회를 함께 방문한 박용주씨(전북 장수군)는 40대가 되어 귀농을 결심하고 사과 농장을 시작했다. 그는 농작물 경매로 자신의 사과가 헐값에 팔리는 것을 보고 결국 농민에게 가장 적은 몫이 돌아가는 유통구조에 충격을 받았다. 이후 “내 사괏값은 내가 결정한다”라는 원칙을 세웠다. “10년 전에는 농민들이 거리로 나서면 도시 사람들도 응원해주었다. 이제는 농민들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도시와 농촌이 멀어지면서 유기농·소농이 죽어가고 있다. 시민에게 호응받는 농민운동을 하려면 우리가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 알고 싶다.”

공공기관 성격을 띠는 농민 자치기구도 있다.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폴란드 등 유럽연합 국가를 비롯해 일본에도 설립된 ‘농업회의소’다. 올해 100주년을 맞는 프랑스 농업회의소는 농업기본법에 근거해 설립된 기구다. 농민계의 최상위 기구로 정부와 EU를 상대하는 대표성을 가진다. 농업회의소 위원과 회장은 농민들의 투표로 결정되고, 이들은 지자체장의 통제나 간섭을 받지 않는다. 정부에 위임받은 농림 사업을 집행하는 권한도 갖는다. 농업기본법에서는 정부나 지자체가 농업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사안을 추진할 경우 의무적으로 농업회의소 자문을 통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농업회의소와 같은 농민 대의기구를 설립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져오고 있다. 대표적 기구가 지역별 농어업회의소다. 농어업회의소는 2010년 농림축산식품부 시범사업으로 시작해 현재 27개 지자체에서 운영 중이다. 그러나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상공회의소처럼 법적 근거를 가지지 못한 채 지방자치단체 조례에만 근거해 설립·운영되고 있다. 자율적인 농민 대표기구로서의 역할에 한계가 있는 셈이다.

파트라이그 엘스너 씨가 최근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트랙터 시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산농촌재단

농어업회의소법 본회의 올라갔지만

제21대 국회에서는 기초·광역·전국 농어업회의소를 설립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농어업회의소법 제정안’이 발의되었다. 지난 4월18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야당 단독 표결로 본회의에 회부됐다. 이를 두고 농민계에서는 찬성과 반대, 그리고 침묵으로 입장이 갈렸다. 정부 예산 지원을 받는 한 관변단체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우려와 농정 자치를 통해 농민의 권익을 높이는 큰 한걸음이 될 거라는 기대가 엇갈린다. 농촌의 중간 지원조직 실무자로 일하며 유럽 농촌을 둘러본 한 참가자는 “지금도 한국 농촌에는 별의별 센터가 많지만 결국 정부가 시키는 일만 하는 식이다. 유럽은 농민이 제안 사업을 만들고 그걸 행정(농업회의소)에서 받아 일이 굴러가게 한다는 게 놀랍다. 결국 관건은 농민이 얼마나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말했다.

4월 중순부터 보름간 이어진 유럽 연수 일정 내내 현지에는 진눈깨비처럼 눈과 비가 흩뿌렸다. 현지에서 만난 유럽 농부들은 이상기후에 한숨을 쉬었다. 3월에는 여름처럼 온화했다가, 4월이 되자 예년보다 10℃나 온도가 떨어져 0℃ 안팎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화사하게 꽃을 틔운 사과꽃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본 박명의씨(충북 괴산군, 콩·고추 농사)는 “이제는 세계 어디를 가나 날씨가 이상한 것 같다. 우리도 최근 5년은 매해 작황 사정이 계속 달라져서 다들 고군분투한다. 농업일지를 20~30권씩 써오던 대농들마저 다른 농법을 고려하는 지경이다”라고 걱정했다.

지역 소멸, 기후위기, 개발에 따른 농지 축소 등은 코앞에 닥친 농업과 농촌의 위기를 계속 환기시킨다. 그 최전선에 농민들이 있다. 위기에 대응할 해법에 ‘아래로부터의’ 농민 목소리는 얼마나 담기고 있을까? “유럽 농민들은 자신들이 체감하는 문제를 직접 행정에 제안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 공동체가 농촌과 농민의 역할과 가치를 존중하는 것도.” 박씨의 말에 다른 농업인들의 눈도 함께 빛났다.


“농민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안드레아스 키르히마이 씨는 ‘투잡’ 농부다. 하루 8시간은 오스트리아 ‘티롤 농업회의소’ 산하에 있는 ‘인스부르크 농업회의소’에서 지역관리 담당 과장으로 일한다. 구두를 벗고 회사를 나선 뒤에는 10㏊ 땅에서 젖소 열두 마리를 키우는 농부가 된다. 그에게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고작’ 소 열댓 마리를 키우는 거라면 그냥 처분하고 직장 생활만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그가 명쾌하게 답했다. 답을 듣자 함께 있던 한국 농민들은 박수를 쳤다. 아래는 키르히마이 씨와의 일문일답.
 

인스부르크 농업회의소에서 일하는 안드레아스 키르히마이 씨. 티롤주 농업인 중에는 키르히마이 씨처럼 ‘투잡’ 농업을 하는 사람이 절반 이상이다. ⓒ대산농촌재단

농업회의소는 어떤 곳인가?

오스트리아 정부는 농업정책과 관련 사업들을 국가기관이 아닌 농업회의소에 일임한다. 티롤 농업회의소에는 직원 180여 명이 일하는데 연방 차원의 농업 관련 교육과 상담을 진행하고 농업인들의 관심사를 모아서 사업도 제안한다. 총 8개 주에 농업회의소가 있으며 그 산하에 ‘인스부르크 농업회의소’ 같은 기초 단위 농업회의소가 존재한다. 최근에는 동물복지 규정이 복잡해지면서 이를 현장에 적용하기 위한 교육과 컨설팅이 늘고 있다. 기후변동에 따른 농법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조직 구성은?

주 회장단 8명과 농업협동조합 대표 2명으로 구성된 회장단 회의가 최상위 기구다. 회장단 회의는 농촌 여성·청소년·에너지 및 기후·법률 등 전문 위원회로 구성된다. 농업회의소는 공적 조직과 비슷해 보이지만 회장을 비롯한 전문 위원회 임원단이 6년 임기의 선출직이다. 이들은 모두 농업 현장에서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다양한 지역·분야별 요구를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예산은?

1년 예산은 1800만 유로(약 267억원) 규모다. 지방비 43%, 국비 12%, 회비 23%, 자체 사업 수익비 22%로 구성된다.

당신과 같은 ‘투잡’ 농업인은 얼마나 되나?

현재 우리 농업회의소 회원 수는 3만7000명이고 대부분 20㏊ 미만의 땅을 소유한 소농이다. 티롤주는 고산 목초지가 많고 평지가 적어서 농업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무척 어렵다. 보조금으로 농가 수익을 보전받기도 하지만, 농민의 55.7%가 나처럼 ‘투잡’을 뛴다.

한국은 농업이 아닌 다른 경제활동으로 연 3700만원 이상 소득을 얻으면 농업정책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직불금도 받을 수 없다.

어째서? 이곳은 그런 규정이 전혀 없다. 보조금을 지급할 때 고려하는 건 농법·위험도·농지 면적 등이다. 예컨대 청년농이거나 유기농 농사를 지을 경우, 경사가 심한 고산 목초지에서 농사를 할 경우에는 더 많은 직불금을 지원받는다. 사람들이 유기농처럼 좋은 농사를 계속 짓도록 하는 게 핵심 아닌가? 참고로 오스트리아는 EU에서 유기농업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다.

당신은 왜 농업을 계속하나? 소가 열두 마리밖에 없는데.

지역마다 전통이 있다. 이곳은 농업, 특히 축산을 하는 것이 전통이고 자부심이다. 경작지와 농가가 줄고 있는 만큼 농사를 짓는다는 사실이 나와 가족들에게는 더욱 자랑스러운 일이 됐다. 농업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럴수록 함께 싸워야 하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다. 농민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티롤주는 오스트리아에서 고산이 가장 많은 곳으로 전체 면적 중 40%가 산림이다. 티롤주 주도인 인스부르크는 알프스가 남북을 둘러싸고 있어서 도시와 산간지대가 가깝다. ⓒ전주영 제공

※ 이 기사는 대산농촌재단의 취재 지원을 받았습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스위스 혼드리히·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 김다은 기자 midnightblu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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