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조원 아낀 'R&D예타' 폐지, 재정건전성과는 '상충' 논란
정부의 연구개발(R&D) 예비타당성조사(이하 예타) 전면 폐지 계획이 정부의 재정건전성 기조와 상충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2023년만 해도 예타를 통과한 사업이 51개 중 12개에 그치며 약 23조원 규모의 사업비가 집행되지 않았다. 타당성을 입증하기 어려운 사업이 남발될 경우 세부적인 면제방안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무분별한 예산 낭비로 재정건전성 확보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특히 R&D 예산 삭감으로 과학기술계를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한 뒤 R&D 예타 전면 폐지를 추진하며 과학기술 정책 관련 혼선을 초래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와 관련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밥 지을 쌀을 다 뺏어놓고 구멍 뚫린 가마솥을 선물해주겠다는 것"이라는 논평을 내놓기도 했다.
28일 대통령 직속기구인 국가자문회의가 조만간 예타를 면제할 R&D 사업의 범위와 예타 없이 사업을 심사할 구체적인 방안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혀 발표 내용에 과학계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
예타는 총사업비가 국비 300억원을 포함해 500억원 이상인 재정사업을 대상으로 사업 타당성을 검토하는 제도다. 과학기술 R&D 예타는 최소 수개월이 소요되기 때문에 빠른 기술 발전 속도에 보조를 맞추지 못해 R&D 역량 제고의 걸림돌이라는 지적을 받으며 개선 필요성이 제기돼왔다. 동시에 대규모 국고 투입이 효율적으로 이뤄지게 하기 위한 거름망 역할을 해오며 국고 재정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 장치라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예타로 걸러진 과학기술 분야 R&D 사업 규모는 적지 않다. 28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2023년 접수된 예타 요구 사업은 16개 부처 51개 사업이다. 총사업비 전체 규모는 30조1462억원이며 사업 당 5383억원 규모다.
예타 대상선정 결과 12개 사업이 선정됐다. 선정된 이들 사업의 총사업비는 7조8303억원이며 사업별 평균 총사업비는 6525억원이었다. 신청된 사업의 선정 비율은 23% 정도로 예타 과정을 거치며 약 23조원 규모의 사업비가 지출되지 않게 됐다.
선정 과정에서 예타는 또 한번 비용 절감 장치로 작동한다. 2015년 한국개발연구원(KDI) 공공투자관리센터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예타 제도가 시작된 1999년부터 2015년까지 실시된 631건의 예타를 통해 절감된 총사업비는 약 124조원으로 나타났다. 당초 사업 계획안에 담긴 시설과 장비의 필요성이나 실현 가능성, 향후 경제성을 검토해 본사업에서 생략되면서 사업비가 적잖이 줄었다.
연구계 일각에선 예타가 폐지됨에 따라 무분별한 사업이 남발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공공과기연구노조는 최근 예타 폐지 방침과 관련한 성명을 통해 "무작정 대형 연구개발 사업에 대한 예타를 전면 폐지하는 데 대해 우려되는 점이 많다"며 "아무런 견제나 검증 장치 없이 대형 연구개발사업이 부처 관료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면 이는 역설적으로 비효율과 카르텔을 조장하게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예타 과정에서 삭감된 사업비에 대해선 삭감 내용에 따라 평가가 엇갈린다. 일례로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지난해 예타 조사 과정에서 담당한 사업의 총사업비를 당초 계획안보다 43.6% 삭감했다. 사업비 절감 자체가 목적임을 가정해도 전문가 검토를 거치는 과정에서 절반 가량의 계획이 타당성을 입증하지 못한 것이다.
반대로 지난해 예타를 통과한 한국형 달 착륙선 개발 사업은 예산이 줄면서 전문가들의 질타를 받은 사례다. 이 사업은 당초 계획했던 6300억원 규모에서 예타를 거치며 5300억원으로 예산이 쪼그라들었다. 예타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기존 계획에 포함됐던 탑재체 개발이 제외되면서다. 이를 두고 일부 전문가들은 착륙선의 실질적인 임무 수행 목표조차 세우지 못한 채 사업이 착수하게 됐다는 지적을 내놓았다.
정부는 예타 면제를 위한 세부 방안을 조만간 공개할 방침이다. 28일 열린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제60회 운영위원회에선 예타 제도개선안을 담은 ‘대형 국가연구개발사업 투자‧관리 시스템 혁신방안’이 상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안건은 아직 심의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아 공개되지 않았지만 예타를 면제할 R&D 사업의 범위, 예타 없이 사업을 심사할 방안 등이 담길 전망이다.
[박정연 기자 hes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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