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심부전 환자? 오시라 하소” 응급실 당직 서는 병원장
지난 27일 오후 6시 대전 서구 건양대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 심장내과 전문의인 배장호(57) 의료원장이 “오시라고 해요!” “오시라 하소!”라고 연이어 소리쳤다. 이날 응급실 당직 의사를 맡은 그는 대전 일대에서 앰뷸런스로 실려오는 환자들과 인근 대형 병원의 환자 전원 수용 요청을 마다하지 않고 모두 받아주고 있었다.
“환자를 보면 외면할 수가 없어요. 우리 병원이 올해 처음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정됐는데, 최종 의료기관으로서 환자들을 돌보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병원장인 그가 이날 응급실을 지키는 이유는 정부의 의대 증원으로 인한 갈등으로 전공의들이 현장을 떠났기 때문이다.
건양대 권역응급의료센터는 2900여㎡ 규모에 중증응급·감염격리·소아응급 병상을 포함해 총 91병상을 갖춘 지역 거점 응급실이다. 전공의 이탈 전 이곳엔 응급의학과 교수 8명과 전공의 8명이 일했는데 현재 전공의가 모두 나갔고 교수 1명도 그만뒀다. 의료진의 과부하가 이어지자, 병원장인 그가 당직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아무리 병원장이라도 다른 교수들에게 응급실을 맡아달라고 부탁하기는 어렵다”며 “제가 직접 근무해보면서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체험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의료 파행 사태와 관련해 정부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환자가 없으면 의사도 없다. 의사는 환자의 이익과 권리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이날 오전 6시 병원에 출근했고, 전문의와 병원장으로서 12시간 동안 막 ‘전투’를 끝냈지만, 응급실 문을 열자 또 다른 최전선이 펼쳐져 있다. 의료진의 심폐 소생을 받는 80대 여성, 머리가 깨진 채 울음을 터뜨리는 남자아이…. 14시간 밤샘 응급실 당직이 시작됐다. 총 26시간의 연속 근무다.
인근 대학병원에서 심부전(심장이 혈액을 신체 조직에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질환)으로 투석이 필요한 중증의 60대 여성 환자를 받아달라는 전원 요청이 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오시라고 해”라고 소리친 배 원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왜 빨리 안 와…”라고 혼잣말을 했다. 빨리 환자 상태를 보고 싶어 초조해진 것이다.
그는 “내일 몸살이 날 것 같다”면서도 “응급실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짧게 말했다. 그는 관상동맥 조영술은 1만번 이상, 부정맥 시술은 1000번 이상 집도하고 세계적인 의학 학술지에 다수의 연구 성과를 게재한 심장내과 명의다. 이날도 오전 6시부터 입원 병동 회진을 하고, 130여명의 심장 환자 외래 진료를 보고, 2시간 30분 동안 각종 심혈관 질환 시술을 했다. 그 사이 틈틈이 병원 원장으로서 보고받고 서류 결재하고 점심은 의사들과 회의 도중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응급실은 각종 기기 모니터와 전선, 병상에 누운 환자, 간호사, 의사가 뒤엉킨 좁은 공간이다. 배 원장은 매 순간 빠르게 걷다가 멈추고, 또다시 재빠르게 움직였다. 응급실 문으로 불쑥 들어오는 병상으로 달려가 환자 상태를 살피고, 순간 한쪽 벽으로 옮겨가 검사 영상을 점검하고 있다. 잠깐 컴퓨터에 앉아 소견을 타이핑한다. 또 다른 병상을 보고 간호사들에게 속사포처럼 지시한다. 그가 머문 곳마다 기압이 팽팽해지는 것 같다. 이날 오후 8시 응급실엔 중증 환자 9명, ‘응급’ 상태 환자 1명, 의료진이 심폐 소생술 중인 환자 1명이 있다. 그와의 대화는 매번 끊겼다. 그는 “(의료 파행 사태 이후) 응급실이 최근에 특히 바빠졌다”고 했다.
-병원장의 응급실 근무는 이례적이다.
“병원장이 행정 업무만 할 게 아니라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병원 측에 따르면, 두 달 전부터 자진해 응급실 당직을 서겠다는 그를 병원 간부 의사들이 거듭 만류한 끝에 이날 첫 응급실 근무가 시작됐다.
-26시간 연속 근무가 가능한가.
“위중한 환자가 많아 체력적으로, 심리적으로 힘들다. 심근경색 환자가 혈압이 갑자기 50 미만으로 떨어져서 쇼크 상태로 병원에 오면 한두시간 수술을 해야 한다. 흥분된 상태로 집에 돌아가 잠을 못 자고 뒤척이다가 다음 날 다시 출근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의사로서 언제 보람을 느끼나.
“특히 야간이나 휴일에 응급 시술이 잘됐을 때 환자 분들이 너무 행복해한다. 보호자 분들도 너무 고마워할 때가 최고의 순간이다.”
배 원장은 “제가 1992년 (전공의인)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내과가 제일 인기가 좋았는데 지금은 제일 안 하려고 하는 과목이 됐다”며 “(요즘은) 환자가 죽거나 사는 문제가 없어서 부담이 없는 과목을 전공하려고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응급·필수 의료는) 항상 환자 ‘콜’(call·부름)에 대기하고, 새벽 1시 넘는 시각에도 응급 콜이 오면 병원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며 “예전에 비해 지원자가 굉장히 많이 줄었다”고 했다.
이번 의정 갈등에 건양대병원도 병원들의 ‘주 1회 휴진’에 동참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환자들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며 휴진하지 않고 계속 진료했다.
-의대 증원이 사실상 확정됐다.
“의사 수를 늘려야 하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증원 수) 1509명은 너무 많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학생들을 가르칠 교수 인원도 늘려야 하고, 준비가 덜 된 상황인 것 같다.”
-사태가 계속 길어지고 있는데.
“의료계와 정부가 서로 한 발씩 양보해야 한다. 어느 한쪽이 100% 만족하는 방향으로 가긴 힘들다.”
-의사들이 상처받고 현장을 떠났다.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환자다. 환자의 이익과 권리를 가장 먼저 생각하고 이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최근 어느 누가 ‘의사가 없으면 환자도 없다’라는 말을 했다는데, 바보 같은 생각이다.”
배 원장은 대구에서 전공의 수련을 마치고 2000년 건양대병원이 개원할 때 합류했다. 그는 “서울에 있는 병원도 좋지만 지역 병원에서, 특히 새로 생기는 병원에서 저 스스로 모든 걸 셋업(set up·수립)해보고 싶은 욕심이 컸다”고 했다. 2002년 건양대병원 심혈관센터가 문을 열고 20년 만인 2022년 심뇌혈관센터가 지어질 때도 건물 내부 구조 결정 등 거의 모든 과정을 직접 챙겼다. 그는 “센터 내 창문 위치, 콘센트 위치 등 모든 시설을 전부 디자인했다”며 “문의 크기, 문 여는 방식 등이 환자의 동선에 영향을 미쳐 진료 효율과도 관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병원장으로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는 필수 의료진을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뇌혈관 시술하는 의사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제 친구 한 명 겨우 찾아서 데려왔다”며 “서울 외 지역에서는 필수 의료 의사, 간호사 모두 구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는 이번 사태에 대한 거듭된 질문에 “의사란 직업은 힘들지만 보람 있다. 이렇게 보람 있는 직업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환자한테 좀 따뜻하게 다가갈 수 있고 환자를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의사가 돼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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