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비둘기 탓 마라, 알고 보면 당신 또한 비둘기다!
많이들 아시다시피 저는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올해로 만 40년째 시인이란 이름표를 달고 살고 있습니다. 시인인 제 숙명 중에 ‘관찰’이 똬리를 틀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관찰을 통해 새로운 ‘은유’를 찾아내기 때문입니다. 동업자들은 잘 알고 있겠지만, 은유라는 것이 단번에 나오는 정답은 아니지 않습니까. 무수한 질문과 오답 속에 정답 하나를 건질 수 있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 그건 관찰이 기본입니다. 사물에 대한 관찰일 수 있고 세상 관계에 대한 관찰일 수 있습니다. ‘그럼 당신은 요즘 무엇을 관찰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저의 시적인 관찰 대상은 가까이 사는 마산의 원도심인 ‘창동’과 창동에서 사는 ‘집비둘기’입니다. 저는 둘의 관계에서 오늘과 내일을 은유하는 문학의 답을 찾고 있습니다.
마산 창동에서도 비둘기는 평화의 새가 아닌지 오래되었습니다. 비둘기는 2009년부터 도시의 유해조수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도심공동화로 쇠락하던 창동은 2011년부터 도시재생 사업이라는 ‘인공호흡’이 시작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비둘기는 신분이 바뀌어 해로운 새가 되고, 창동은 서서히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낙인’과 ‘회생’ 사이 비둘기와 창동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가 요즘 제 관심 주제입니다.
비둘기를 자세히 관찰하다 보면 우아한 빛깔의 외투를 입은 귀족 같은 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외투 속에 진균을 가져 사람에게 위험한 동물이며, 현주소는 창동 여기저기를 떠돌며 주워 먹기 바쁜 ‘걸인 신세’입니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야성을 찾게 해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자는 구청의 경고 현수막이 여기저기 붙어 있고, 비둘기는 오늘도 길거리에 버려진 먹이를 찾아다닙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고 했습니다. 날기를 포기한 새도 마찬가지입니다. 퇴화하는 날개를 접어두고 두 발로 바삐 걸으며 사람이 흘린 음식 쓰레기를 남김없이 쪼아 먹고 있습니다. 비둘기에겐 창동이 밥상이며 창동이 감옥인 셈입니다. 비둘기는 종종걸음으로 한 끼를, 하루를 구걸하며 살다가 점점 굵어지는 목으로 진화하며 창동 청소부인 양 구석구석 깨끗이 쓸고 다닙니다.
비둘기에게 두려움과 경계란 동물의 본능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먹이 활동하는 곁으로 차량이 지나가고 사람이 지나가지만 본능은 주린 배를 채우기만 바쁩니다. 그러다 차에 치여 비명횡사하는 비둘기가 나오기까지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한 요즘 제 문학적인 1차 결론은 비둘기에게 ‘철학이 없고 문학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제 답은 정답이 아니며 터무니가 없습니다만.
새벽부터 저녁까지 삼삼오오 무리를 이뤄 다니는 창동 비둘기는 하루하루 비자를 연장하듯 살아가는 창동의 ‘난민’입니다. 저는 그 비둘기들을 통해 왕년은 가고 고령화 저출산 시대 노인만 남아 늙어버린 오늘과 내일의 창동 주소를 보고 있습니다. 비둘기가 유해조수가 되고부터 숱한 외면과 비난 속에 ‘닭둘기’ ‘쥐둘기’라고까지 조롱받지만, 하루를 살기 위해 비둘기는 창동 거리를 배회하며 신이 허락하지 않고 사람이 버린 일용할 먹이만을 찾는 데 도시문제가 있습니다.
서울 명동 부럽지 않았다고 추억하는 마산 창동처럼 비둘기에게 한때 무리 지어 날던 자유의 푸른 하늘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잡아먹는 본능 다 잃어버리고 걸어서 주워 먹는 일에 길들여진 ‘저 비둘기가 창동이다’는 생각을 저는 떨칠 수가 없습니다. 비둘기가 구걸하는 창동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산의 주산인 무학산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둘기는 가까운 자연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이 도시에서 비둘기와 사람이 공생하는 문학적인 답을 찾기 위해 골똘합니다. 도시 비둘기 문제 대책 중의 하나로 비둘기를 자연으로 되돌려보내자고 쉽게 말합니다만, 비둘기를 저렇게 길들인 것은 모두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경고하고 싶습니다. ‘비둘기 탓하지 마라. 알고 보면 당신 또한 비둘기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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