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네이처 논문을 읽는 벤처투자자
누구에게나 결정적 순간은 있다. 인생에서든 커리어에서든 말이다. 그런 결정적 순간은 이후 인생에 오래도록 큰 영향을 끼친다. 필자도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커리어에서 몇 번의 결정적 순간을 겪었다.
필자는 융합생명공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대학병원 교수 등을 거치며 소위 전문가로 커리어를 시작한 이후 디지털헬스케어 분야의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벤처투자자로 변신했다. 디지털헬스케어 분야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회사를 한국에서는 처음 창업한 것이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직접 그 분야의 스타트업에 투자한다는 아이디어였다.
이후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필자는 특이하게도 디지털헬스케어 분야의 전문가와 벤처투자자라는 서로 다른 2가지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지금도 필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순간 하나를 이야기해볼까 한다.
회사를 창업한 초창기 시절의 이야기다. 지인의 소개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한국을 방문한 유명한 벤처캐피탈리스트와 미팅할 기회가 있었다. 바이오헬스케어 분야에서 유명한 투자자였는데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바이오텍이 된 회사에도 초기에 투자했고 당시 디지털헬스케어 분야에 투자를 늘려가는 분이었다.
서울 여의도의 한 고급호텔 비즈니스라운지에서 그분을 만났는데 처음에는 자세가 영 심드렁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현재 우리 회사는 적어도 국내 헬스케어 벤처투자 분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나름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고 40여개에 달하는 투자포트폴리오를 보유한 회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갓 시작한 이름 없는 작은 투자사였다. 투자포트폴리오라고 해봐야 쓰리빌리언이라는 작은 스타트업 하나뿐이었다. 유령회사라고 해도 정말 할 말이 없는 지경이었다.
마지못해 나와의 미팅에 나온 듯한 그분과 단둘이 여의도 풍경을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처음에는 심드렁하게 소파에 파묻히듯 비스듬히 앉아 있던 그분은 이야기를 나눌수록 점점 앞쪽으로 나를 향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일단은 그분이 이야기하는 실리콘밸리의 모든 유망한 디지털헬스케어 스타트업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몸은 한국에 있었지만 대화내용은 실리콘밸리의 동료 벤처투자자와 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더 결정적인 것은 그분이 이야기하는 우리 분야의 주요 논문을 내가 거의 다 읽었고 더 나가 그분이 못 읽은 최신 논문 몇 개를 꼭 읽어봐야 한다며 내가 추천해준 것이다.
그렇게 1시간 정도를 이야기하자 나에 대한 그분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미팅 이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는 내게 그분이 악수를 청하며 한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네이처 논문을 읽는 벤처투자자와는 언제든 이야기를 나눌 가치가 있지요."
그분은 아마도 이 이야기를 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이는 내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친 결정적 순간이었다. 특정 분야에 집중해서 투자하는 전문투자자는 그 전문성을 갈고 닦는 것을 결코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글로벌에서 아직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아도 전문성을 계속 갈고 닦으면 진짜 전문가는 그것을 알아보기 마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로 회사의 규모가 제법 커지고 투자한 회사의 숫자도 더 많이 늘었지만 지금도 나는 업무시간의 일정부분을 따로 떼어놓고 열심히 논문을 읽는다. 때로는 밀린 논문을 읽기 위해 주말의 상당 부분을 헌납할 때도 있다. 이런 과정이 거센 강물을 거슬러 헤엄치는 것처럼 지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면 여의도 호텔에서 자세를 고쳐앉던 그 유명 벤처투자자의 모습과 "네이처 논문을 읽는 벤처투자자와는 언제든 이야기를 나눌 가치가 있다"는 말을 듣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게 된다.( 최윤섭 디지털헬스케어파트너스 대표)
최윤섭 디지털헬스케어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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