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에 전통주 넣고 맨해튼 레스토랑 순례하는 한국인 소믈리에
“법학 교수인 독일인 남편과 음악가인 영국인 아내가 프랑스의 알자스 지방 여행 중 지역 레스토랑에 들렀다. 타르트 플랑베(Tarte Flambée·얇은 반죽에 각종 토핑을 올려 구운, 피자와 타르트 중간 형태 음식), 소시지와 슈크루트(Choucroute·발효시킨 양배추), 코코 리슬링(Coq au Riesling·닭에 리슬링 와인을 첨가해서 만든 요리)과 냄비 요리 베케오프(Baeckeoffe·고기와 야채를 찐 음식) 등 레스토랑의 다섯 코스 메뉴에 어울리는 페어링을 프랑스의 각기 다른 지역, 다른 품종 와인으로 다섯 병 선택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라.”
‘마스터 소믈리에’의 서비스 부문 구두 시험의 예다. 지형과 기후, 품종, 생산 방법, 농사 지식에 관한 1차 이론 시험, 블라인드로 와인 6종을 맞힌 다음 25분간 설명하는 2차 테이스팅 시험을 통과한 후에야 응시 자격을 얻는다. 서비스 부문 시험에서는 음식에 어떤 허브를 사용했는지, 트러플이 들어갔는지, 또 무슨 소스가 첨가되었는지 같은 조리 방법을 상세히 기술한 메뉴를 제공한다. 프랑스나 이탈리아는 물론 아시아, 멕시칸, 스페인 등 다양한 음식이 주제로 출제된다. 실제 레스토랑처럼 세팅해 놓고, 와인 온도를 맞추는 것, 레드와인을 디캔팅하는 과정, 그리고 잔에 따르는 서비스를 병행하면서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이 문제의 핵심은 접객이다. 마스터 소믈리에라고 하면 ‘신의 물방울’ 만화에서 묘사한 것처럼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각종 와인을 귀신같이 맞히는 기술자를 떠올리지만 그렇지 않다. “마스터 소믈리에는 타이틀이 아니라 증명하는 것이다”라는 표현처럼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손님과 소통하는 일, 즉 서비스를 중요시한다. 소믈리에는 와인 전문가로서 지식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손님의 더 나은 식사 경험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마스터 소믈리에 협회(Court of Master Sommeliers)’에서 주관하는 이 시험을 모두 통과한 한국인은 아직 한 명밖에 없다. 2016년에 타이틀을 딴 김경문(40)이 그 주인공이다. 전 세계에서 273명, 세계외식의 각축장이라는 뉴욕에도 12명 정도밖에 없는 숫자다.
김경문 소믈리에는 고등학교 때 유학을 떠나 뉴욕의 ‘미국요리학교(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서 요리, 네바다주립대학(UNLV)에서 레스토랑 경영을 전공했다. 수업 중에 와인에 따라 음식 맛이 달라지는 신기함에 와인 세계로 빠져들었다. 다양한 식재료를 접한 경험은 와인만 시음하면서 훈련한 소믈리에들보다 유리한 배경이 되었다. 흔히 와인 향이나 맛을 식재료와 비유하며 묘사하고, 또 그 조화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소믈리에는 드라마에서 종종 정장 차림으로 잔에 따른 와인을 멋지게 돌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시음하는 이미지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은 직업이다. 그 수준까지 도달하기 위한 시간과 노력이 상당하고, 특히 레스토랑의 진정한 환대와 서비스에는 와인 감정 이상의 또 다른 차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김경문은 졸업 후 뉴욕의 미슐랭 별 두 개 레스토랑인 ‘정식’과 ‘모던(Modern)’에서 근무하면서도 마스터 소믈리에 시험 준비와 함께 마음속에 늘 “와인을 잘 아는 것보다 손님을 잘 아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간직해 왔다. 그래서 손님 취향을 위해서 별도로 생각과 연구를 하고 다양하게 와인을 추천하는 노력을 꾸준히 병행해 왔고,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여기까지가 김경문 소믈리에 인생의 전반전이다.
전 세계 미슐랭 별 세 개 레스토랑보다 적다는 마스터 소믈리에는 그만큼 대우도 좋다. 하지만 김경문은 그걸 포기하고 새로운 도전을 택했다. 2019년 한국의 전통주를 미국에 알리고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정식’에서 소믈리에로 근무하던 기간, 고급 한식당에 걸맞은 우리의 전통주가 구비되지 않은 데 실망하는 외국인 손님들을 보고 깨달은 것이 계기였다. 이를 위해서 전국의 양조장 1200여 군데를 돌아다니며 시음하고 수입할 술을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누룩을 빚어 발효시키는 전통주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마치 부르고뉴의 와인 생산자들이 만드는 것과 같은 열정과 집념을 보고 감동했다. 그러면서 이런 명주가 국내 술 소비량의 5%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해외에 알려지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은 해외의 일식당을 통해서 50년 넘는 전통 음식과 술의 홍보와 판매에 공을 들여왔다. 그리고 그 가치에 적절한 돈을 지불하는 문화를 구축한 지 오래되었다. 반면 한식은 이민자와 유학생들의 향수와 배를 채워주는 싸고 푸짐한 음식으로 시작, 당연히 식당의 술도 녹색 병 소주와 병맥주가 대부분이었다.
해외 시장이 넓지는 않지만 한식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듯 전통주 역시 무한한 미래가 기다리는 블루오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김경문은 몇 년째 미국 전역 레스토랑들을 방문하며 우리 술을 소개하고 메뉴에 어울리는 조합을 제안하고 있다. 과거에 깔끔한 양복을 입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손님을 접대하다가 전통주 여러 병이 들어간 배낭을 메고 맨해튼의 레스토랑을 순회 방문하는 일상의 변화는 이제 익숙하다.
레스토랑의 술 담당자들은 선망하는 마스터 소믈리에가 몸소 찾아와서 설명하니 모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시음하며 음식과 맞춰보려고 노력한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데니 마이어의 레스토랑 ‘맨해타(Manhatta)’에서 푸아그라 메뉴와 페어링 된 양촌청주의 ‘우렁이쌀’을 소개하며 “견과류의 풍미가 가득한 청주의 구수함이 살짝 단 과일 잼을 바른 푸아그라와 절묘하게 어울린다”며 극찬했다. 이런 반응을 볼 때면 김경문은 본인이 하는 일이 한식 완성과 미래를 위한 씨앗을 뿌리는 작업이라는 생각에 보람을 느낀다. 조금씩 우리 전통주에 관한 인식이 변하는 흐름도 느낀다. 레스토랑이라는 공간에 술을 부어서 작품을 완성한다는 소믈리에. 현재도 진행되는 김경문 인생 제2막의 좋은 성과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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