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그럴 수 있지요, 그래도 괜찮아요
4월과 5월은 사람들의 감정이 요동치는 시기이다. 내담자분들과 우울감, 감정기복과 충동성, 불안감, 관계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다루었다. 감정의 파고가 가라앉는 요즘 자주 만나는 복합적이면서 강력한 정서가 있다.
- 연인과 싸웠는데 제가 성격에 문제가 많다보니… 아무래도 제 탓 같아요.
- 점심시간에 부서가 함께 식사를 하는데 그때 뭔가 실수를 저지를 것 같아서 긴장되고 밥도 잘 못 먹어요.
- 친구가 저와의 약속을 자꾸 미루어서 섭섭하고 화가 나는데, 제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기 두려워서 거리만 두고 있어요.
-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화를 내는 제가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각각의 사연에는 자책, 사회불안, 분노, 두려움 등이 각각 드러나지만, 공통적으로 깔려 있는 것은 “스스로를 결함이 있고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자아의식에서 비롯된 고통스러운 감정”인 수치심이다. 관계에서 존중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치심을 느끼게 되지만 시간이 흐르면 회복된다. 그러나 자신과 세상에 대한 관점을 만들어가는 생애 초기에 충분히 이해받지 못하고 감정을 무시당한 아이들은 자신이 세상에 적합하지 않고 결함이 있는 존재이며 이는 어떻게 해도 채우기 어려울 것이라는 느낌을 내면화하게 된다. 주 양육자의 정서적 방치 외에도 집단 따돌림이나 학교 폭력을 경험한 경우 자신이 충분치 않은 사람인 것 같은 느낌, ‘잘못된 존재’라는 느낌이 깊이 남는다.
내면화된 수치심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닌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 부적절감을 느끼고 있으니 자신의 강점이나 성취에 대해서도 평가가 박하다. 막상 성과가 잘 나와서 남들이 인정을 해도 자아상이 왜곡되어 있어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혐오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커서 쉬지 못하고, 업무에서 완벽을 추구하고 무리하다가 번아웃증후군에 빠지기 쉽다.
가장 큰 문제는 대인관계이다. 내가 이 집단에 있어도 되는지조차 안심할 수 없으니 내가 이런 감정을 진짜 느끼는 것인지,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감정을 수용받은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감정을 느낄 때 수치심을 함께 느끼게 되어 감정을 드러내기 어렵다.
요약하자면 수치심은 나의 부족으로 인해 관계가 끊어짐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대인관계를 전제로 하여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거절을 예상함으로써 미리 느끼는 절망이다. 필요한 만큼의 애정과 수용을 받지 못했음에도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자신이, 과거에 사랑받지 못했으니 앞으로도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잘못된, 그리고 안타까운 미래 예측이다. 우울과 불안, 공황장애, ADHD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알려졌으나 어린 시절의 정서적 방치와 복합 트라우마, 이로 인한 수치심에 대해서는 더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자기비난에 대응할 자기변호 연습을 시작해보면 좋겠다. ‘부족하다고 거부하다니! 그런 친구 필요 없다!’는 배짱도 키워가면 좋겠다. 장기적으로 왜곡된 렌즈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신건강전문가와의 꾸준한 상담과 치료가 필요하다는 점도 덧붙이고 싶다.
집단주의적이며 경쟁이 심한 한국사회는 어떤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구성원이 수치심을 느끼기 쉬운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새로 들어온 구성원에게 눈치껏 적응하기를 바라는 문화도 좋지 않다. 자신이 ‘못마땅하고 달갑지 않고 성가신 존재’로 여겨질 때 수치심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서로에게 서툴고 무력한 시간을 허락하고, 허둥대는 상대에게 “그럴 수 있지요, 그래도 괜찮아요”라는 이해를 건넬 때, 우리의 연결을 막는 수치심의 벽은 힘을 잃을 것이다.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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