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갈대의 시간 [1인칭 책읽기: 신경림 시인]
신경림 시인 별세
비인간의 시대
우리가 싸워야 할 것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갈대, 신경림,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72쪽.
신경림 선생님이 22일 아침 8시 17분에 이승을 떠났다. 「창비시선」의 첫 시작을 신경림 시인의 '농무'로 시작했음을 생각했을 때 신경림 시인의 죽음은 리얼리즘 시대의 마침표처럼 느껴진다.
신경림 시인은 1935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나 동국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墓碑」 등이 추천돼 시단에 등장했다. 그는 우리나라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사람 사는 이야기와 민요들을 모으는 데 관심을 기울였고,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신경림의 「농무」는 1970년대 한국 시단에 큰 충격이었다. 농민의 삶 속 아픔을 리얼하게 묘사하며 민중문학의 힘찬 전진을 예고한 이 시집 한권으로 신경림은 우리 시단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 중 한 사람이 됐다.
농촌이 저물어가던 시절 특히 '만해문학상'을 받은 「농무」는 개발독재 시대에 이데올로기적으로 눌리고 2·3차 산업의 활황에 밀려난 농촌의 열악한 현실을 시편 하나하나마다 전형적으로 포착해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민중의 삶에 뿌리박은 서정성과 친숙한 가락으로 리얼리즘을 구현했다고 평가받는 신경림의 시 세계는 「농무」 이후 몇 단계의 변모를 거쳤다. 하지만 언어의 경제성에 충실하면서 시와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그의 발걸음은 변함이 없었다.
1970~19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선 문단의 자유실천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도 시를 구호로 쓰지 않았다. 1990년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자본의 총공세 속에서도 불의와 비인간을 용납하지 않는 그의 올곧음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우리의 삶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제 농민 대신 특수고용노동자, 자영업자 등으로 불리는 새로운 경제 주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전 시대의 문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여기 신경림 시인이 잠들었다. 신경림 시인의 죽음에서 한 시대의 마침표를 읽는다. 이제는 뚜렷하게 싸워야 할 '적'이 사라졌다. 신경림이 싸웠던 군부, 산업화, 전통적 자본주의는 이제 과거의 일이 됐다. 한 시대가 이렇게 잠든다.
하지만, 신경림 시인이 그토록 싸워왔던 '비인간'의 시대는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어쩌면 시인 삶의 근간이었던 비인간 문제는 더욱 심화한 시기일지도 모른다. 은밀해지고 복잡해진 시스템은 우리를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만들어 내고 있다.
배달플랫폼에 숨은 노동자, 진짜 고용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화장실 청소부, 알바 플랫폼에 있는 수많은 프리랜서이자 자영업자들 모두 신경림 시인의 시에 담긴 민중의 애환을 이어받아야 할 또 다른 주인공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조용히 운다. 아직 갈대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마침표는 새 문장의 시작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민우 문학전문기자
문학플랫폼 뉴스페이퍼 대표
lmw@news-paper.co.kr
Copyright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