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새 만에 5만명이 청원 서명했는데…국회 외면에 ‘도현이법’ 결국 폐기 수순
발의 법안 폐기 위기에 ‘답답하다’던 피해 가족…국회서 진전 없어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일본 도요타 자동차가 미국 현지 법원의 평결로 급발진 의심 사고 피해자와 합의한 일이 있다. 2007년 9월, 오클라호마주 고속도로 출구에서 발생한 급발진 의심 사고로 중상 입은 운전자 진 북아웃의 이름을 딴 ‘북아웃 소송’이다.
차가 인근 장벽에 부딪쳐 동승자 1명이 사망한 사고에서 오클라호마주 법원 배심원단은 전자식 엔진조절장치 불량을 원인으로 보고, 도요타의 300만달러(약 41억원) 배상 평결을 내렸다.
임베디드(Embeded) 소프트웨어 전문가 마이클 바(Michael Barr) 교수가 이끄는 컨설팅 전문 ‘바 그룹(Barr Group)’의 분석과 증언이 재판에서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엔진 스로틀 컨트롤시스템(ETCS) 소프트웨어 결함으로 급발진이 일어날 수 있다고 밝히면서다.
연이은 급발진 의심 사고 등으로 1000만여대라는 이례적인 리콜을 했던 도요타는 2014년 벌금 12억달러(당시 환율 기준 1조2000억원)를 내고 기소유예를 받기도 했다. 다만, 배상금 등으로 거금을 내면서도 도요타는 ‘운전자 조작 과실이거나 바닥 매트가 가속 페달을 눌러 문제가 일어났다’는 등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민간 그룹이 급발진 의심 사고 해결에 나선 것으로 유명했던 이 사례는 지난해 6월 국회에서도 언급됐다.
제407회 국회 임시회 정무위원회 회의에서 허영·박용진·정우택 의원이 발의한 ‘제조물 책임법 일부개정법률안)’ 안건을 논의하면서다. ‘도현이법’으로 불리는 개정안은 소비자가 아닌 제조사의 차량 결함 입증책임을 묻는다. 2022년 12월 강원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로 숨진 도현 군의 이름을 따 이름이 붙었다.
사고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 이상훈씨의 국회 국민동의청원안도 테이블에 오른 회의에서 누가 급발진 의심 사고 원인을 입증하느냐를 두고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청원은 사안의 심각성 등이 널리 알려지면서 닷새 만에 국민 5만명이 동참해 곧바로 정무위로 넘겨졌다.
개정안과 이씨의 청원안 등을 살펴본 지난해 4월 정무위 검토보고서에는 “입증책임 분배는 ‘공평 이념’에 근거해 결정할 필요가 있다”며 “피해자 주장만으로 결함의 부존재 입증 등 소송에 필요한 전반 사항 입증책임을 제조업자에게 모두 부담하는 것이 합리적인지 신중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나와 있다.
박성준 위원은 소비자의 입증이 어려운 점을 들어 제조업자의 입증책임을 강조했고, 윤영덕 위원도 “제조사가 자동차에 대한 여러 자료를 갖고 있다”며 제조사의 입증책임 필요성을 내세웠다.
윤수현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은 “신고 건수가 더 늘어날 수 있고 산업계 부담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다. 입증책임 전환에 관한 충분한 검토와 다방면에서의 의견 수렴 필요성을 앞세우면서다.
양정숙 위원은 “내연기관 자동차만 있던 수십 년 전에도 입증책임 전환 이야기는 있었다”며 전기차 등이 도로를 누비는 현시점에서의 입증책임에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종윤 위원은 ‘피해와 결함의 인과관계를 제조업자가 입증하라는 입법례가 다른 나라에서 없는 것으로 안다’던 윤 부위원장 설명에 “사회가 바뀌었다”며 “제도적 근거를 만드는 게 정부와 국회가 할 일”이라고 받아쳤다.
최 위원은 기술 고도화 시대에서 패러다임 변화에 앞장서야 할 정부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다면 직무유기라고도 지적했다.
‘당장 법 처리는 어렵겠지만 계속 심사하겠다’던 윤한홍 위원장의 마무리로 향후 논의 장이 지속될 것으로 기대됐지만, 더 이상의 추가 언급이 없어 개정안은 21대 국회 임기 만료를 하루 앞두고 폐기 수순에 들어갔다.
그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급발진 의심 사고로 숨진 도현 군은 지난 1월 명예졸업장을 받았고,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 여부를 밝힐 ‘재연 시험’이 지난달 사고 현장에서 열린 데 이어 27일에도 진행됐다. 굉음과 함께 급가속 현상으로 모닝 승용차를 추돌하기 전 ‘자동긴급제동장치(AEB)’ 미작동이 결함에 해당한다는 점을 입증하는 목적이다.
시험에는 사고 차량과 같은 ‘2018년식 티볼리 에어’와 모닝 차량 동일 크기의 모형 스티로폼이 쓰였다. 사고 당시와 비슷한 속도 하에 가속페달과 기어만 조작하고, 브레이크는 밟지 않는 조건으로 총 세 차례로 나뉘어 이뤄졌다.
세 차례 시험에서 차는 AEB의 정상 작동으로 모형 스티로폼 앞에서 멈췄다. ‘모닝 추돌 전 전방 추돌 경고음이 일곱 차례나 울렸는데도, AEB가 작동하지 않은 건 결함에 해당한다’던 도현 군 가족 주장의 강화 결과다.
제조사 측은 ‘AEB는 가속페달 변위량이 60% 이상이면 해제 된다’, 즉 60% 이상의 힘으로 페달을 밟았다면 AEB가 작동하지 않았을 거라며 결함을 부정해왔다. 페달 변위량은 가속 정도를 퍼센트(%)로 변환해 나타내는 기록을 말하며 99%부터 ‘풀 액셀’로 평가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도 ‘AEB는 운전자에 의해 해제되어 작동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며 제조사 측 주장과 궤를 같이했다.
도현 군 가족 소송대리를 맡은 법률사무소 나루 하종선 변호사는 “시속 40~46㎞의 가속페달 변위량이 60% 이하라는 건 자동차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며 “AEB 미작동은 이번 사고를 발생시킨 또 하나의 이유”라고 주장했다.
하 변호사는 “설사 차량 결함으로 급발진이 발생했더라도 모닝을 앞에 두고 AEB가 작동했다면 비극을 방지할 수 있었다”며 “AEB가 작동하지 않은 건 치명적인 결함”이라고 강조했다.
이씨는 “소비자인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감정과 검증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며 “모든 감정 결과 운전자는 페달 오조작을 하지 않았고, AEB의 미작동은 명백한 차량 결함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제조사의 태도와 국과수의 미온 검증을 비판한 후에는 “‘제조물 책임법 일부법률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는다면 답답하고, 억울하고, 울분이 터지는 이 상황들을 계속해서 맞닥뜨려야 한다”며 “22대 국회가 시작되면 다시 한번 제조물 책임법 개정을 촉구하는 국민동의 청원을 내겠다”고 덧붙였다.
도현 군 가족은 지난달 19일 진행한 공식 재연 시험 감정 결과도 발표했다. 이들은 ▲제조사 측 주장과 달리 ‘변속패턴’이 다른 점 ▲차량에는 결함이 없다는 국과수의 분석과 비교했을 때 ‘주행데이터’는 현저히 다른 점 ▲‘풀 액셀’을 밟았다는 사고기록장치(EDR) 기록대로 이행한 결과 ‘속도 변화’가 훨씬 컸던 점을 들어 ‘할머니는 페달 오조작을 하지 않았음이 입증됐다’고 주장했다.
가족의 처절한 외침에도 더 이상 ‘도현이법’에 눈길을 주지 않은 21대 국회는 28일 마지막 본회의를 끝으로 사실상 종료됐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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