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 극찬한 ‘크레모나의 별’…“수백년 뒤에도 기억되는 악기 제작자 되고파” [인터뷰]
최연소 회원된 한국인 안아영 씨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스트라디바리·과르네리·아마티…. 수 백년간 현악기를 만들어온 ‘명장’들의 고향이자 200여 개에 달하는 ‘악기 공방’이 모여있는 곳에 K-웨이브의 손길이 닿았다.
“머리 맡에 바이올린을 두고 자던 8세 소녀, 16세기 거장 스트라디바리의 요람 크레모나에서 꿈을 이루다.” (뉴욕타임스(NYT) 기사 중)
그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세계를 보는 아이였다. 매끈한 완성품에 둘러싸인 곳에서 직조되기 이전의 세상을 봤다. 바이올린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우아하게 굴곡진 바이올린의 모양에 반해 “이 악기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겨우 30대 초반, 크레모나 악기 제작자 협회의 최연소 회원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0년 정도다. 미국 NYT는 한국인 바이올린 제작자 안아영(32) 씨를 “바이올린 제작계의 떠오르는 스타”라고 표현했다.
스트라디바리의 고향인 이탈리아 북부 도시 크레모나에 머물고 있는 안아영 씨는 최근 헤럴드경제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나를 담아내는 악기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여덟 살에 처음 만난 바이올린의 애칭은 ‘옐로 울프’였다. 금빛으로 빛나는 몸통을 가진 데다, 당시 쓰던 어깨받침의 브랜드가 ‘울프’여서 이런 이름을 지었다. 안씨는 “그 때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가 남성답다는 생각을 했다”고 돌아봤다.
바이올린을 배운 게 된건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경기도 평택에서 자란 그는 “처음엔 ‘방과 후 수업’ 에서 악기를 하나씩 배워야 했기에 취미삼아 시작했다”며 “어머니와 서울의 백화점에 가 샀던 것이 옐로 울프였다”며 웃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에 보람과 성취를 느끼며 전공을 결심, 서울의 한 예고까지 진학했지만, ‘악기 제작자’라는 직업에 호기심을 가진 것은 그보다 한참 전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쯤 동네에 악기상이 하나 생겼는데, 수많은 악기가 쫙 펼쳐져 있어 뭔가 신비로워 보였다”고 회상했다.
그날부터 소녀의 놀이터는 동네의 악기사였다. 또래 친구들은 굳이 관심을 두지 않는 곳이었다. 학교를 마치고는 당연한 듯 들렀고, 주말에도 매일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눈치도 없이 사장님이 짜장면을 시켜주면 열심히 먹었고, 집에도 안 가고 종일 악기를 구경했다”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악기를 제작하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안씨는 “악기 제작자를 꿈 꾼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라고 말한다. 다만 그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와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 교집합이 된 것 같다”며 웃는다. 내 손으로 바이올린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간직했지만, 꿈을 이루는 길이 쉽게 찾아오진 않았다.
“지금은 전문 학교에서 제작을 배울 수 있고, 공방에서 악기 제작 과정이 있지만 그 땐 할 수 있는게 없었어요. 그래서 연주를 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어요.”
악기를 배울수록 재능을 보이며 “예고에 보내라”는 선생님들의 조언이 이어졌다. 그는 “사실 잘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바이올린 전공으로 서울의 덕원예고에 가게 됐다”면서도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갈증과 조바심이 커졌다”고 회상했다.
설상가상 예고에 진학하니 악기사에 갈 일은 더 많아졌다. 심지어 평택과 달리 서울은 다양한 악기사들이 훨씬 많아 그에겐 천국이나 다름 없었다. 결국 고등학교 2학년께 악기를 만드는 유학을 가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안씨는 “혈혈단신 떠났지만, 미성년자는 악기 제작 학교에 입학할 수 없어 미국 시카고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먼저 이수했다”며 “학과 과정이 만만치 않아 도서관에서 새벽까지 공부하다 잠들기 일쑤였다”고 돌아봤다. 미국에서 3년 간 공부한 그는 지난 2011년 크레모나의 국제 바이올린 제작 학교(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스쿨)에 결국 입학했다.
이곳은 전 세계에서 다양한 학생들이 모이다 보니 연령대도 다양했다. 안씨는 5년 과정의 학교에 2학년으로 입학, 4년 만에 졸업했다. 당시 학교에서도 ‘막내 라인’이었다고 한다.
학교에선 ‘바이올린 제작’이라는 신세계가 열렸다. 바이올린 하나를 만들기 위해 무려 40~50가지의 세분화된 과정을 거친다. 모든 작업은 전통적인 수작업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는 “첫 작업은 쪼개진 통나무를 깎는 것부터 시작한다”며 “정성들여 나무를 깎는 과정을 마치면 칠을 하고, 그 다음 줄을 올려 소리를 담는 작업에 돌입한다”고 말했다. 보통 바이올린은 단풍나무와 가문비나무를 써서 제작한다.
“오래된 나무는 나이테가 생기는데 이 나무가 어떤 사계절을 보냈는지, 어떤 건조 과정을 거쳤는지에 따라 저마다 성질과 밀도가 달라요. 그래서 똑같이 제작을 해도 결과는 다 다르죠. 간단한 과정처럼 보이지만 이 안에 수십 가지의 공정이 있고, 자기만의 노하우가 쌓이기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해요.”
바이올린을 처음 만들 때를 떠올리며 안씨는 “기대를 품고 왔는데 막상 시작해보니 너무나 막막했다”며 “첫 해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보내고 그 다음 해부턴 조금 익숙해지며 재미가 붙게 됐다”고 말했다.
학교 졸업 후엔 현지 공방에서 3년 간 일하다 2020년 크레모나에서 자신의 예명을 따 ‘아리에티 현악(Arietti String)’이라는 공방을 열었다. 학생 시절부터 졸업 이후까지 그는 콩쿠르도 숱하게 휩쓸었다. 피소네 현악기 제작 콩쿠르, 로마 국제 바이올린 제작 콩쿠르 등에서 입상하며 일찌감치 현지의 유명인사가 됐다. 그는 “콩쿠르엔 전 세계 제작자들이 모이다 보니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보며 자극도 된다”며 “콩쿠르를 통해 1차 검증을 받으면 제작자로서의 커리어와 판매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처음 악기를 만들었을 땐 무려 일 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평균 2~3개월 정도면 완성된다. 하나의 악기를 건조할 동안 다른 악기 작업을 진행할 수 있어 제작 기간이 줄었다. 그는 “악기는 오래 보고, 오래 손에 잡고 있을수록 결과물이 좋게 나온다”고 했다. 전통의 작업 방식을 고수하며 장인의 마음으로 다가서는 일이기에 공들인 시간만큼 악기의 품질이 달라진다.
현재 크레모나엔 160~200개의 악기 공방이 모여있다. 크레모나는 16세기부터 현악기 제작 명장들이 바이올린을 만든 곳으로, 2012년에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3대 거장인 스트라디바리·과르네리·아마티의 악기 최고가는 1500만 ~2000달러(한화 200억~270억원)에 달한다.
안씨의 바이올린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전 세계 곳곳에서 그의 악기를 만나기 위해 모인다. 안씨의 악기는 현재 2000만원~3000만원 정도. 그는 “악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최종 목표는 좋은 소리를 찾는 것인데 무엇보다 연주자가 편하게 느끼는 소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의 바이올린은 기성품이 아니다. 솔리스트인지 오케스트라 단원인지 역할에 따라 다른 악기가 필요하기에 제작 전 연주자와의 충분한 대화를 통해 ‘맞춤형 악기’를 만들어간다.
안씨는 “악기를 만들던 초창기와 비교하면 외관부터 소리까지 많은 점이 달라졌다”며 “이전엔 나만의 스타일과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었다면 지금은 내가 만든 악기에서 안아영이라는 사람이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악기를 완성한 후 가장 마지막 단계는 악기 안쪽에 불도장으로 그의 이름(Ayoung An)을 찍는 것이다. 이를 제작자들은 ‘세례’ 과정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악기 제작자가 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것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언젠가 수백년의 시간이 흘러도 제가 만든 악기와 이름이 남겨지고 누군가는 기억해준다는 것에 (감정이) 벅차 오르더라고요. 악기를 통해 소통할 수 있고, 이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저를 기억한다는 믿음이 있어 매일의 최선을 다하게 돼요. 그렇게 하루, 일주일, 한 해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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