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러시아 접근’, 조선을 누란의 위기에 빠뜨리다

길윤형 기자 2024. 5. 2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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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333333;">길윤형의 조선의 갈림길 _07</span>
청·일·영 모두가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 혈안이 된 상태에서 고종이 추진한 대러 접근은 국제 정세의 흐름을 오독한 처절한 실패작이었다. 이 틈바구니에서 고종이 살아남은 것은 그의 기대와 달리 러시아가 조선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울 게오르크 묄렌도르프(1847~1901)는 외교·통상 업무에 문외한인 조선을 위해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리훙장)이 ‘헤드헌팅’한 인재(전 주톈진 독일영사관 부영사)였다. 임오군란 이후 청에 사은사로 간 조영하와 함께 1882년 12월10일 제물포에 상륙해 그달 26일 고종과 만났다. 묄렌도르프는 청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강력한 힘에 둘러싸인 조선이 살아남으려면 “이보다 더 강력한 제3의 힘”인 러시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조선 이름은 목인덕(穆麟德)이었고, 흔히 목 대감이라 불렸다. 한겨레 자료사진

“앞으로 만백성들과 약속하노니, 나는 감히 스스로 총명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며 감히 여러 가지 사무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간사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개인 재산을 모으지 않으며 오직 공적인 것만 들을 것이다.”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이라는 두 변란을 겪은 뒤 고종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임오군란이 발생한 직접적 원인은 고종 내외의 사치와 민씨 척족의 부패였고, 갑신정변이 벌어진 것은 고종이 청에 맞서 ‘조선의 자주’를 내세운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들에게 부화뇌동했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갑신정변을 뒤처리하는 한성조약을 체결한 직후인 1885년 1월15일 백성들 앞에 치욕적인 반성문을 내놓았지만, 정작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는 식언(食言)하는 사람이었다.

갑신정변 직후 고종은 조선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큰 ‘외교적 도박’에 나선다. 청·일 모두를 견제하기 위해 ‘제3의 세력’인 러시아의 힘을 빌려 오기로 한 것이었다. 고종의 결단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이는 외교차관에 해당하는 협판교섭통상사무를 맡고 있던 독일 출신 외교관 파울 게오르크 묄렌도르프였다. 그의 부인 로잘리가 1930년 펴낸 ‘묄렌도르프 자전’을 보면, 일본은 “300년 전부터 조선의 숙적”이었고, 청은 “자신의 예속국(조선)이 위급한 상황에 놓였을 과연 일본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을지 매우 회의적”인 상태였다. 만약, “조선이 청국 이외의 어떤 다른 힘에 의지해야 한다”면 그 대안은 국경을 맞댄 대국인 “러시아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는 조선의 종주국을 자임하는 청이나 그 옆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일본은 물론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당대 패권국인 영국을 자극할 수 있는 위험한 움직임이었다. 나아가 의지하고 싶다는 것은 조선의 희망사항일 뿐 러시아가 이를 받아들일지, 또 어떤 가혹한 대가를 요구할지 알 수 없었다. 어찌됐든 고종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중신들과 숙고해 결단을 내린 뒤 흔들림 없는 자세로 실행해야 했다.

서울 박동(수송동)에 있었던 묄렌도르프의 저택. 1884년께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구체적인 움직임이 시작된 것은 1884년 12월부터였다. 묄렌도르프는 나가사키에서 알렉산드르 다비도프 주일 러시아 공사를 향해 ‘조선을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삼고,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200명의 해군으로 구성된 함대를 인천에 보내달라’는 전보를 타전했다. 외교장관인 김윤식 독판교섭통상사무에겐 일언반구 알리지 않은 채였다.

다비도프로부터 이를 보고받은 니콜라이 기르스(1820~1895) 러시아 외무대신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러시아는 1884년 7월7일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지만, 상주 공사를 파견하진 않은 상태였다. 진의를 확인해야 했다. 기르스가 조선으로 가는 알렉세이 슈페이에르 주일 러시아 공사관 1등 서기관에게 보낸 전문을 보면, 살벌한 제국주의 외교의 최전선에서 있던 그의 신중함을 읽어낼 수 있다. “조선이 러시아 정부에 원하는 바가 무엇이며, 이에 대해 조선이 무엇을 제안할 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현재 조선이 외국 열강과 모종의 거래를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다른 국가와 조약을 체결하여 지켜온 조선의 입지가 얼마나 허약한 지를 묄렌도르프가 잘 이해하도록 하라.” 청·일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에 접근하는 것은 전쟁을 부를 수 있는 극히 민감한 외교 행위임을 알린 것이다.

군함 라즈보이니크호를 타고 1884년 12월28일 인천에 도착한 슈페이에르는 30일 서울에 도착했다. 묄렌도르프는 슈페이에르에게 △조선을 불가리아와 같은 보호국으로 삼거나 △그게 불가능하다면 조선을 중립화해 ‘아시아의 벨기에’가 되게 해달라고 말했다. 그 대가는 한반도 남부의 부동항인 운콥스키만(포항 영일만)이었다. 일본을 자극할 것이 틀림없는 아슬아슬한 제안이었다. 신중한 기르스는 이를 물지 않았다. 이듬해인 1885년 1월20일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으면 “청 또는 일본과 충돌이 일어나 러시아가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더 큰 희생을 치를 것”이라는 보고서를 써 알렉산드르 3세의 재가를 받았다.

조선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 갑신정변 수신사의 일행으로 1885년 2월 도쿄로 간 묄렌도르프는 다비도프와 만나 독일어로 된 구상서를 전했다. 이를 통해 러시아에 2000명의 병사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장교 4명과 하사관 16명으로 구성된 군사교관을 조선에 보내달라고 했다.

그 직후 ‘그레이트 게임’의 풍랑을 한반도에 몰고 온 놀라운 사건이 발생한다. 영국이 러시아 견제를 위해 4월15일 거문도를 전격 점령한 것이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양국 갈등이 커진 상황에서 러시아가 갑신정변 이후 힘의 공백(청·일은 4월18일 톈진조약을 맺어 조선에서 동시 철병을 결정한다)을 활용해 한반도로 남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급습을 당한 러시아는 ‘영국 견제’를 위해 군사교관을 파견해 달라는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재차 조선으로 향한 슈페이에르는 6월9일 서울에 도착했다.

뒤늦게 고종과 묄렌도르프의 ‘비밀 외교’를 알게 된 김윤식은 경악했다. 청·일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은 김윤식은 6월20일, 24일, 7월2일 등 세 차례 슈페이에르와 만나 “묄렌도르프는 군사교관을 초빙할 권한을 위임받지 않았다”며 버텼다. 만약 고종이 러시아에게 의지해 청·일의 간섭을 떨쳐내려 했다면, 이 반대를 꺾고 뜻을 관철해야 했다. 하지만, 그럴 만한 배짱이 없었다. 고종은 남정철 이조참판을 7월10일 톈진으로 급히 보내 이 모든 게 ‘묄렌도르프의 월권’ 탓이라 변명하고 파면과 소환을 요구했다. 버림받은 묄렌도르프는 8월 말 면직돼 11월 조선을 떠났다.

조선의 대러 접근이 일본에 전해진 것은 5월30일 곤도 마스키 대리공사의 전문을 통해서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은 6월5일 쉬청쭈(서승조) 주일 청국공사와 만나 대응책을 논의했다. 이 기가 막힌 회담 내용은 ‘일본외교문서’ 메이지연간추보 제1책의 352~365쪽에 남아 있다. 이노우에가 말했다.

“이 나라 외교의 졸렬함으로 인해 귀국과 우리나라 양국에 화를 초래할 것이다.”

“경직유위(鯁直有爲·강직하고 재능이 있는)한 인물을 선발해 스스로 개량하게 하면 어떤가.”

“지금 같은 상황에선 효과가 없을 것이다. 졸자 예전에 조선에서 왕과 만났을 때 가까이서 그 풍채를 보니 올해 대략 34~35살로 보였다. 그 나이에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한다면 현량한 인물을 보내 잘 타일러 권유한다 해도 진선거악(進善去惡)할 수 없을 것이다.”

더 분노한 것은 청이었다. 리훙장(이홍장)은 고종을 견제하기 위해 임오군란 이후 3년이나 잡아 두고 있던 ‘정적’ 대원군을 귀국시켰다. 또 11월17일엔 당시 고작 27살이던 위안스카이(원세개)를 주차조선통리교섭통상사의에 임명해 가혹하고 노골적인 내정간섭에 나선다.

위안스카이(원세개·1859~1916)는 1885년 11월 불과 27살의 나이에 주차조선통리교섭통상사의에 임명돼 조선에 대한 노골적인 내정간섭을 이어갔다. 고종의 대러시아 접근을 확인한 1886년 8월엔 리훙장(이홍장)에게 “이 혼군을 폐위해야 한다”고 건의하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바탕 폭풍이 지난 뒤인 10월6일, 이후 러시아의 친조선 정책을 주도하게 되는 카를 베베르(1841~1910)가 러시아의 초대 공사로 서울에 부임했다. 보리스 박의 ‘러시아와 한국’에 따르면, 1886년 8월5일 명성왕후의 최측근인 민영익이 그를 찾아 “사방이 막힌 가운데 조선을 도울 수 있는 국가는 오직 러시아뿐”이라는 고종의 뜻을 전했다. 나흘 뒤인 9일엔 고종의 밀서가 몰래 전달됐다. “과인은 지금까지의 관계를 깨고 다시는 조선이 다른 국가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러시아 정부가 과인을 버리지 않고 보호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줄 것을 기대하며, 이를 비밀로 지켜주기 바란다.”

카를 베베르(1841~1910)는 1885년부터 1897년까지 무려 12년이나 조선에서 근무하며 러시아의 대한 정책을 현장에서 이끌었다. 아관파천(1896)으로 고종(제일 앞줄의 왼쪽)과 세자(훗날이 순종)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때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베베르는 앞줄 제일 오른쪽에 선 인물이다. 러시아 연구자 벨라 박이 러시아 신문 ’노보예 브레먀’의 1907년 7월치 신문에서 찾아냈다.

고종의 운명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이 ‘극비 서한’은 놀랍게도 청에 통째로 유출된다. 분노한 위안스카이는 이홍장에게 전보를 보냈다. “이 혼군(昏君)을 폐위하고 이씨 중에 현명한 자를 따로 옹립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리고 수천명의 병사가 그 뒤를 따른다면 러시아는 중국 군대가 먼저 들어온 것과 한(조선)이 새 군주로 바뀐 것을 보고 손을 뗄 것입니다.”

청·러는 고종이 벌인 ‘서커스 외교’의 뒷수습을 위해 1886년 9월부터 톈진에서 협상을 시작했다. 라디젠스키 주청 러시아 대리공사는 10월24일 조선 영토의 현상 유지를 조건으로 한반도로 남하하지 않겠다고 구두 약속했다. 청이 이런 뜻을 전하자 영국도 1887년 2월 거문도를 떠났다. 청·일·영 모두가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 혈안이 된 상태에서 고종이 추진한 대러 접근은 국제 정세의 흐름을 오독한 처절한 실패작이었다. 이 틈바구니에서 고종이 살아남은 것은 그의 기대와 달리 러시아가 조선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가 실제 조선에 손을 뻗쳤다면, 세계열강이 한반도에서 충돌하는 참혹한 비극이 발생했을지 모른다.

길윤형 | 논설위원.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공부했다. 도쿄 특파원,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으로 일하며 일제 시대사, 한-일 과거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 등을 둘러싼 기사들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신냉전 한일전’ 등이 있고, ‘공생을 향하여’ ‘북일교섭 30년’ 등을 번역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볼 줄 아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고 믿는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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